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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모악산 아래 4대 종교성지를 둘러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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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사→금산교회→금산사→수류성당

귀신사

귀신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의 말사로 676년(통일신라 문무왕 16) 의상이 창건한 사찰이다.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모악산에 자리하고 있다. 통일신라 말기의 문장가 최치원이 머물며 '법장화상전'이라는 책을 편찬하기도 했다. 당우로는 보물 제826호로 지정된 대적광전을 비롯해 영산전, 명부전, 설법전, 요사채가 있다. 전북유형문화재 제62호 귀신사삼층석탑, 제63호 귀신사부도, 제64호 귀신사 석수, 보물 제 1516호 귀신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등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화강암재로 이루어진 삼층석탑은 귀신사의 창건과 함께 조성된 것이다. 신라시대 석탑의 양식미를 그대로 계승한 작품이다. 부도는 청도원 마을 입구의 논 가운데 있다. 이로 미루어 짐작컨대 절의 사세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석탑과 조각수법이 대동소이한 부도는 조각이 정교하고 예술적이다. 석수는 다른 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등 부위의 중간에 석주가 꽂혀 있다. 귀신사의 본디 이름은 국신사였다. 이곳에서 통일신라 말기의 문장가 최치원이 머물며 '법장화상전'이라는 책을 편찬하기도 했다. 이 책은 당나라 법장화상의 수행과정에 관해 쓴 책이다. 고려시대 때 원명국사가 중창하였는데 이때는 구순사라는 이름이었다. 1873년(고종 10) 다시 절을 정비하면서 귀신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금산사

금산사는 백제법왕 원년(599)에 창건되었다. 통일신라의 의적화상은 당나라 현장문하에서 유학하고 금산사에 돌아와 25부 70여권의 방대한 유식사상의 저술을 남겼다. 숭제법사와 진표율사를 거쳐 고려 혜덕왕사로 이어지면서 유식학 법상종의 종주로 자리매김하였다. 정유재란 후, 1635년 수문대사가 금산사를 중건하면서 미륵과 화엄의 2원 체계로 도량을 정비하였다. 조선영조 원년 환성 지안대사는 전국에서 모여든 1,400여 스님이 운집한 가운데 화엄산림을 개최하였다. 근래들어 월주스님에 의해 미륵바로알기운동을 펼치고 있으며, 대사회 활동을 통해 자비와 보살행을 몸소 실천하는 사찰임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금산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되어 1400여 년의 역사를 이어 오늘날까지 법등을 밝혀온 유서 깊은 명찰이다. 금산사 일원은 사적 제49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호남평야 가운데 우뚝 솟은 모악산 서쪽 자락에 위치해 있다. 정유재란 때 왜군의 방화로 모든 건물과 산내의 40여 개 암자가 완전히 소실되는 등 수난을 겪었으나 이후 많은 문화재가 조성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1년(599년)에 나라의 복을 비는 자복사資福寺로 창건된 것으로 전한다. 진표율사眞表律師가 금산사의 숭제법사崇濟法師에게 출가했다는 기록과 통일신라 초에 활동한 의적義寂(681-?) 스님이 당나라 현장스님에게 유학하고 돌아와 금산사에 머물며 25부 70여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는 기록들을 통해 당시 금산사가 창건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금산사가 대사찰의 면모를 갖춘 것은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가 주석하며 시작되었다. 진표율사는 미륵전을 짓고 미륵장륙상을 조성하였으며 해마다 단壇을 열어 법시法施를 널리 베풀었다. 후삼국시대에 금산사는 다시금 역사서에 등장한다. 후백제의 군주 견훤이 아들 신검 등에 의해 금산사에 감금되었다가 탈출하여 왕건에게 투항하였다는 내용이다. 금산사에는 ‘견훤성문’으로 불리는 개화문과 석성 등 견훤과 관련된 유적이 전하고 있다. 백제 : 이 세상의 도솔천 모악산 금산사 중관 해안中觀海眼이 쓴 『금산사사적』(1635) 에는 “백제 법왕 1년(599)에 법왕이 즉위하여 살생을 금지하는 법을 발표하고, 이듬해(600)에 금산(사)에 38명의 승려를 득도시켰으며, 또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진표율사가 금산사의 숭제법사에게 출가했다는 기록이나 통일신라시대 활동한 의적스님이 금산사에 주석했다는 기록을 보면 금산사가 백제시대에 창건되었음은 확실하다. 통일신라 : 진표율사, 미륵신앙의 토대를 세우다 진표율사는 신라 경덕왕 대에 활동한 스님으로 사실상 금산사의 창건주라고 할 수 있다. 진표율사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진표전간眞表傳簡」과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嶽鉢淵藪石記」, 『속고승전續高僧傳』 등에 비교적 상세하게 남아 있다. 고려시대 : 법상종의 중심도량이 되다 법상종法相宗은 유식사상唯識思想과 미륵신앙을 기반으로 성립된 종파로, 고려시대 11세기 초 목종과 현종 이후 왕실과 관련을 맺으면서 크게 융성하였다. 이 시기에 법상종의 대표적인 사찰인 금산사 또한 중흥하였다. 혜덕왕사 소현慧德王師 韶顯(1038-1096)이 금산사의 주지로 취임하면서 금산사는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혜덕왕사가 금산사에 주석하는 동안 남아 있는 법당을 모두 보수·중축하는 것은 물론 새롭게 중창하였다. 현존하는 석조물인 방등계단, 석련대, 노주 등이 이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산사의 사역이 대사구大寺區, 봉천원구奉天院區, 광교원구廣敎院區의 세 구역으로 나뉘게 된 것도 모두 혜덕왕사의 중창에서 비롯된다. 조선 : 자비심으로 나라를 지켜내다 조선시대 금산사는 1492년 세조의 서자 덕원군 이서李曙가 금산사를 불사한 기록이 있어 당시 왕실과 연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조 25년(1592)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7년에 걸쳐 조선의 국토를 황폐화시켰다. 호남지역 또한 의승군이 집결하였는데, 그 중심 사찰이 금산사였다. 호남의 의승군을 이끈 뇌묵 처영雷黙處英은 금산사에서 출가하였고 후에 묘향산으로 가서 서산대사에게 선종의 종지宗旨를 전수받았다. 뇌묵 처영대사는 사명대사 유정과 함께 서산대사의 2대 제자로 일컬어진다. 총섭의 지위를 받고, 후에는 ‘국일도대선사부종수교보광현랑뇌묵國一都大禪師扶宗樹敎葆光玄朗雷黙’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이 시기 조정에서 전국의 사찰 가운데 선교16종 규정소를 설치하였는데, 금산사는 전라우도 규정소로 지정되어 도내의 여러 사찰을 관할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전라좌도와 전라우도를 관할하는 규정소로 확대되었다. 인조 13년(1635)에 이르러서야 금산사는 낙성을 보게 되었는데, 오늘날 우리가 보는 금산사 가람은 이때 복원된 것이 대부분이다. 사찰 중건과 함께 당시 주지였던 지훈 스님과 간고 천택스님, 용면 응지스님 등이 주선하여 중관 해안스님으로 하여금 1635년 11월 『금산사사적』을 편찬하게 하였다. 현재 필사본으로 전하고 있는 『금산사사적』은 재건 공사와 함께 자료를 수집하여 작성한 것이다. 또한 조선 후기 금산사에는 호남불교의 중심 사찰이라는 위상에 걸맞는 스님들이 주석하였다. 대표적인 스님으로 백곡 처능 선사, 남악 태우 대사, 환성 지안대사 등을 들 수 있다. 근현대 : 일제하 금산사의 수난과 극복 1935년 3월 큰 화재로 미륵전 본존불이 전소되었다. 당시 공모전이라는 파격적인 방식(불모 일섭스님 등 당대 유명 작가 5인 응모)으로 진행되었는데 일본 동경대에서 수학하고 갓 돌아온 김복진씨가 당선되어 복원불사가 시행되었다. 김복진은 서양조각을 공부한 근대 조각가이다. 그는 새로운 재료인 석고를 이용하면서도 전통을 계승한 미륵대불을 완성하였다. 1961년에 금산사의 주지로 부임한 태공 월주 스님은 미륵전을 비롯하여 많은 불사를 이루었고 여러 스님들의 노력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62년 조계종 통합종단이 만들어지면서 17교구의 본사로서 조계종의 종헌과 종지종풍을 따르고 있다.

천주교수류성당

1890년대의 호남에는 3개의 성당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을 천주교로 귀의시켰다. 되재(升峙완주군 화산면), 나바위(羅岩:익산군 망성면 화산리), 수류(김제시 金山面 禾栗里) 본당이 바로 그것이다. 노령산맥의 주봉인 모악산과 상두산 국사봉에 둘러싸인 수류본당은 라끄루신부가 확보한 대지위에 2대 페네 신부가 48간의 성당을 1907년에 건축하였다. 시골에서는 처음보는 웅대한 한국 전통의 건축양식이었다. 1908년에는 仁明學校를 세워 전북특별자치도 최초의 신식학교로서 한문과 신학문을 가르쳤다. 수류본당의 관할은 김제, 부안, 정읍, 순창, 고창, 담양, 장성까지였다. 3대 투르테신부이후 뤼카, 이상화, 최민순, 석종관 신부를 거쳐 최재선 신부 때에는 원평에 공소를 세웠다. 10대 이약슬 신부 때 해방을 맞았고 김후성 신부 때 6·25를 맞아 유서깊은 구성당이 소실되고 말았다. 이때에 수류는 피난처로 소문이 나서 신부와 수도자들이 50여명이와서 은신하고 있었다. 공산당들은 이들을 잡기 위하여 수류성당의 신도 50여명을 붙잡아서 신부와 수도자들의 은신처를 물었다. 그러나 신도들은 결사의 각오로 성직자들의 숨어있는 곳을 토설하지 않았다. 결국 공산당들은 유서깊은 수류성당을 불질러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50여명의 신도들은 공산당에 의해 학살 당했다. 성당이 소실된 까닭에 6.25 이후 10년간인 1960년까지 수류지역의 신자는 김제본당에 소속되었다. 1959년에는 현대식 성당을 재건하여 전주교구 관하의 수류본당을 재건하고 부흥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류는 한국뿐아니라 동양권에서 가장 많은 신부를 배출한 지역으로 이름이 나 있다. 11명의 신부(김영구, 정재석, 서정수, 김반석, 김영일, 범석규, 박영규, 안복진, 박문규 등)와 11명의 수도자를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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