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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정읍,전주] 유네스코 세계유산 고인돌 구경하기

코스 중 고창읍성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고창선운산도립공원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황토현 전적지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내장산국립공원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김제 벽골제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전주한지박물관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고창읍성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고창선운산도립공원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황토현 전적지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내장산국립공원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김제 벽골제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전주한지박물관의 대표 이미지
연관태그
서부권 2박3일 체험형 테마코스 유적지 체험 세계문화유산투어
여행후기
★★★★★ (1)건
코스소개
  • 고창읍성
  • 고창선운산도립공원
  • 동학농민혁명기념관
  • 황토현 전적지
  • 내장산국립공원
  • 김제 벽골제
  • 전주한지박물관

수학여행코스

○ 1일
학교출발 → 고창읍성 관람 → 고인돌 유적지 관람 → 숙소 → 석식 → 학교 자체 프로그램 운영 또는 자유시간 → 취침
○ 2일
기상 → 조식 → 전봉준 장군 생가 관람 → 동학혁명기념관, 황토현 전적지 관람 → 중식 → 내장산 관람 → 벽골제 체험장 관람 → 석식 → 학교 자체 프로그램 운영 또는 자유시간 → 취침
○ 3일
기상 → 조식 →전주한지박물관 관람 →전주 한옥마을 관람 → 중식 → 학교 이동

코스소개

우리 근대사 최대의 개혁운동이며 사상운동인 동학농민 혁명의 자취를 쫓는, 눈으로 보는 역사·문화 체험의 여정이다.
정읍은 동학농민혁명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곳이다. 개혁혁명운동의 성지가 되는 고부농민봉기의 중심지이며, 전봉준·김개남·손화중·최경선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고창의 무장기포지는 전봉준이 손화중을 설득해 농민군을 모아 전면적 봉기를 단행한‘동학농민혁명 발상지’다. 김제와 전주 역시 동학의 이야기가 숱하다.

고창읍성

고창읍성은 자연석으로 만든 성곽으로 사적 제145호로 지정되었으며 모양성이라고도 부른다. 이곳은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석성으로, 고창의 방장산을 둘러싸고 있다. 읍성임에도 불구하고 산을 둘러 성을 쌓았기 때문에 파괴되지 않고 비교적 잘 보존된 성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성이다. 고창읍성은 여자들이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여자들만이 참여하는 성밟기 행사가 매년 이루어진다. 성밟기 놀이는 마을의 평안과 개인의 액막이를 겸하는 목적도 있고, 외적을 방비하는 성을 1년에 한 번씩 점검하고 발로 성을 밟아 견고하게 다지는 목적도 있다. 고창읍성의 성밟기는 머리에 손바닥만한 돌을 이고 3번을 도는데, 한 바퀴를 돌면 다리병이 낫고, 두 바퀴를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를 돌면 극락승천한다는 전설이 있다. 이렇게 쌓인 돌은 유사시에 좋은 무기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성내에는 1871년에 세운 대원군 척화비가 서 있고 읍성 앞에는 조선 후기 판소리의 대가인 신재효의 생가가 있다. 조선시대 고창현의 읍성으로서, 장성 입암산성과 함께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전초 기지의 역할을 하였다. 전래풍속_답성(성밟기)놀이 답성(성밟기)놀이 성을 밟으면 병이 없어 오래살고 저승길엔 극락문에 당도한다는 전설 때문에 매년 답성놀이 행사가 계속되고 있으며, 성밟기는 저승문이 열리는 윤달에 해야 효험이 많다고 하며 같은 윤달이라도 3월 윤달이 제일 좋다고 한다. 또한 엿새날이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라고 하여 초엿새, 열엿새, 스무엿새날에 답성 대열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리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 돌면 극락승천 한다."고 한다. 성을 돌 때는 반드시 손바닥만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돌아 성 입구에 다시 그 돌을 쌓아 두도록 되어 있다. 고창 읍성이 아낙네들의 힘만으로 축조되었다는 전설적 사연으로 답성도부녀자들 만의 전유민속이 되었지만 흙 한줌, 돌 한 개도 모두가 부녀자들의 손과 머리로 운반, 구축되었던 당시의 대역사를 되새겨 보는 뜻으로 돌을 머리에 이고 도는 풍습이 남아있다. 또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도는 관습은 여인네들의 체중을 가중시켜 성을 더욱 단단히 다지게 하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깊은 뜻은 이 성곽의 축성 배경이 왜침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유사시의 석전에 대비하는 유비무환의 예지로서 머리에 인 돌을 성안에 쌓아 두고갔다는 전설도 모두가 호국의 예지를 빛내 주는 이야기들이다. 고창군에서는 답성민속을 기리기 위해 음력 9월 9일인 중양절을 군민의 날로 정하고「모양성제」와 함께 답성놀이를 재현하고 있다. 전래풍속_수문장 재현 수문장 재현 음력 9월 9일을 전후하여 4일간 '모양성제'가 열리며, 이때 조선시대 관군복장을 갖춘 수문장이 고창읍성을 수호하는 장면을 재현된다. 고창 읍성의 성곽 주위에 수십개의 옛 진영 깃발을 꽂아 고을수령(현감)이 재임하던 시절 관아의 위엄을 갖춰놓고 형형색색의 멋진 조선시대 관군복에 칼을 든 수문장과 흑백색의 순라복장에 창을 든 포졸을 공북루에 배치했다. 특히, 스스로 관군이 되어보기를 원하는 관광객을 위해 관리사무소에 관군복을 비치해 놓고 이를 빌려줌으로써 사진촬영을 통해 관군으로서의 체험도 직접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도 마련해 놓고 있다.

황토현 전적지

동학농민운동의 첫 승리를 이끌어낸 역사의 현장 정읍의 황토현 전적지는 최초의 전승지로 그때의 역사를 담아내고 있다. 사적 제295호로 지정된 이곳은 당시 태인과 고부를 연결하는 요지이자 동학농민운동이 촉발된 이후 이를 진압하기 위해 온 관군과 맞선 첫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현장이다. 결의를 다진 동학농민군은 황토현에서 관군을 상대로 승리한다. 당시 관군은 2,300명 정도로 숫자는 농민군보다 적었지만, 죽창을 들고 싸우는 농민군과는 비교할 수 없는 화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에 농민군은 스파이를 심고 일부러 전투 장소를 이리저리 바꿔가면서 관군을 지치게 만들다. 그리고 관군이 지친 새벽에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역사를 바꿀 첫 승리를 거두게 된다. 동학농민봉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황토현 동학농민봉기가 동학란 또는 동비(東匪)의 난이라는 이름으로 폄하되어 평가되던 시대인 일제강점기와 1950년대까지는 황토재는 구전으로 기억되어 왔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동학농민봉기가 지닌 반봉, 반외세의 민족운동이었다는 역사적 의의가 새롭게 평가되면서 황토현 전적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1963년에 비로소 황토현에 동학혁명기념탑을 세우기 위한 동학혁명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그해 10월에는 동학농민봉기 당시 농민군의 봉기와 승전을 기념하는 최초의 동학혁명기념탑이 이곳 황토현 전적지에 건립되었다.

내장산국립공원

호남 5대 명산 중 하나로 말이 필요없는 곳 내장산 국립공원은 호남 5대의 명산 중 하나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8경 중 하나로 손꼽히는 내장산은 1971년 우리나라 8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으로 본사인 영은사의 이름을 따서 영은산(靈隱山)으로 불리다가 산 안에 감춰진 것이 무궁무진하다고 하여 안 내(內), 감출 장(藏)을 따서 내장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신선봉(763m)을 주봉으로 하는 내장산은 봉우리들의 높이가 700m 내외지만 봉우리 정상이 저마다 독특한 기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예로부터 ‘호남의 금강’이라 불리고 있는데 특히 내장사와 단풍 길은 가을이면 많은 분들이 단풍을 보기 위해 찾는 우리나라 최고의 단풍 명소이다. 아름다운 단풍이 만들어지려면 온도와 햇빛, 그리고 수분의 공급이 잘 맞아야 하는데 내장산 국립공원은 남부 내륙 지방이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가을 일교차가 크고, 일조시간이 길어서 단풍이 더 곱게 든다고 하며, 아기단풍나무가 많아 단풍잎이 작고 물드는 빛깔도 오색 빛으로 붉은 단풍, 노란 단풍 등 다양하게 물든다고 한다. 또한 내장산 국립공원 입구에 있는 내장저수지 주변에는 작은 공원을 포함하면 8개의 공원이 모여 있고 저수지 주변으로는 걷기 좋은 데크길이 조성되어 있다.   ​

김제 벽골제

벽골제 벽골제는 우리나라 최고 최대의 저수지로 『삼국사기』에는 신라 흘해왕 21년(330)에 “처음으로 벽골제를 만들었는데, 둘레가 1천 8백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이 지역이 신라 땅이 아닌 백제의 땅이었으므로 나중에 연도를 고쳐서 신라가 만든 것처럼 보이도록 해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실제로 만들어진 때는 백제 11대 비류왕 27년(330)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후 신라 원성왕 6년(790)과 고려 현종 및 인종 21년(1143)에 고쳐 쌓은 후, 조선 태종 15년(1415)에 다시 쌓으나 세종 2년(1420)에 심한 폭우로 유실되었다. 지금 유적에는 일직선으로 약 3㎞ 정도의 둑만이 남아있는데, 일제강점기인 1925년 ‘동진토지개량조합’에서 이 둑을 농사짓는데 필요한 물을 대는 통로로 고쳐 이용하면서 그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다. 둑의 북쪽에는 조선시대에 벽골제를 다시 쌓고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 세운 비석이 있는데, 닳아서 글을 알아보기 어렵다. 1975년에는 저수지 물의 양을 조절하던 수문이 있던 자리 2곳을 발굴조사하였는데, 그 결과 대규모의 높은 수준의 측량기술이 이용된 공사였던 것이 밝혀졌다. 벽골제는 단순히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라는데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당시에 이미 이러한 저수지 축조가 가능할 정도의 고도로 발달된 토목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과학기술사에서도 획기적인 사실을 제공해 주는 유적이다. 현 벽골제단지에는 벽골제와 농경문화를 대주제로 전시 및 자료수집과 연구조사를 진행하는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 김제를 발원지로 일제강점기를 다룬 소설 아리랑의 자료를 전시하는 아리랑문학관, 그리고 전북미술계의 거목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친 나상목선생의 벽천미술관과 김제 우도농악관 등 문화시설과 각종 야외전시가 있다. 사적 벽골제와 각종 박물관들은 오래된 고을, 김제의 지역정체성 및 문화를 대내외에 천명하는 문화공간이자 휴식공간의 역할을 수행하며 문화백년지대계 김제를 표방하고 있다. 출처 URL | 김제시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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