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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순창,전주] 동학역사여행 (1박2일)

코스 중 고창선운산도립공원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도솔암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병바위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만석보유지비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전봉준장군 피체지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강천산군립공원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임실치즈테마파크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전주한옥마을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전주 경기전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동학혁명유적지기념관의 대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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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 중 병바위의 대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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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 중 전봉준장군 피체지의 대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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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권 1박2일 동학역사여행 유적지 가족 연인 친구 체험 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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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소개
  • 고창선운산도립공원
  • 도솔암
  • 병바위
  • 만석보유지비
  • 전봉준장군 피체지
  • 강천산군립공원
  • 임실치즈테마파크
  • 전주한옥마을
  • 전주 경기전
  • 동학혁명유적지기념관

[1일] 고창선운사 도솔암 마애불 → 병바위/책바위 → 전봉준생가터(전봉준장군 흉상만들기 체험) → 만석보 → 전봉준장군 피체지
[2일] 강천산 → 임실치즈체험센터(치즈만들기 체험) → 전주한옥마을/ 경기전 /전주동학혁명기념관


○ 병바위/책바위
: 대취산 신선이 잠결에 상을 걷어차서 술병이 거꾸로 꽂혔다고 전설이 전해지며 이승만 전 대통령 얼굴을 닮았다고 함


○ 전봉준장군 피체지 (순창)
: 19세기말 조선의 사회적 모순과 외세의 침탈로 인한 피해를 극복하기 위한 동학농민혁명의 마지막 장소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 역사적 현장이다.

도솔암

도솔암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에 있는 조선 후기 선운사 도솔암의 지장보살상을 안치한 불전으로 내원궁에는 미륵보살이 장차 부처가 되어 세상을 제도할 때를 기다리며 머물고 있다고 전한다. 도솔암 소개 동백과 꽃무릇으로 유명한 선운사의 산내 암자이다. 동, 서, 남, 북, 상, 하 여섯 개의 도솔암이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상, 하, 북 세 개만 남았다가 현재는 북도솔암을 중심으로 통합되었다. 지장보살좌상과 마애불 등의 보물이 있다. 선운사사적기에 따르면 백제시대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도솔암에 얽힌 전설은 이와 배치된다. 신라 진흥왕이 이곳에서 미륵삼존불의 꿈을 꾸고 선운사와 함께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정확한 내력이야 알 수 없지만 이 암자는 '도솔'이라는 이름에서도 보이듯 미륵신앙과 뿌리가 닿아 있다. 현존 당우로 대웅전, 내원궁, 나한전, 요사 등이 있다. 내원궁에는 보물 제280호로 지정된 지장보살좌상이 있다. 도솔암 서쪽 거대 암벽에는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보물 제1200호이다. 천연기념물 제354호 장사송 도솔암으로 향하다 보면 또 하나의 천연기념물을 만날 수 있는데, 천연기념물 제354호인 장사송이 그것이다. 하나의 나무에서 2개가 갈라져 수려한 반송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사송은 도솔암으로 오르는 길에 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볼거리다. 보물 제1200호 도솔암 마애불 보물 제1200호인 도솔암 마애불의 모습, 정확한 명칭은 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으로, 선운사 도솔암 내원궁이 있는 칠송대라는 암봉의 남벽 단애에 조각된 거대한 불상이다. 보물 금동지장보살좌상 고창 선운사 도솔암 금동지장보살좌상(高敞 禪雲寺 兜率庵 金銅地藏菩薩坐像)은 청동 불상 표면에 도금한 불상으로 선운사 도솔암에 모셔져 있다. 머리에는 두건(頭巾)을 쓰고 있는데, 고려 후기의 지장보살 그림에서 보이는 양식이다.

만석보유지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에 있는 조선 말기의 보 자리로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되었다. 신태인에서 고부로 가는 약 4㎞ 지점의 동진강을 건너는 다리 하류에 보 뚝을 쌓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원래 만석보는 정읍천과 태인천의 상류 지점에 배들평 농민들이 설치하였다. 이 만석보는 예동보, 광산보라고도 불렀는데, 가뭄이 심해도 이 보에서 물을 끌어다 쓰는 배들평은 흉년 없이 농사를 지었다고 해서 만석보라고 불렀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에 반기 그럼에도 1893년(고종30) 고부군수 조병갑이 세금을 거두기 위해 만석보 바로 아래에 새로운 보를 일부러 쌓았다. 조병갑은 농민들을 강제로 징발하여 부역을 시키고 남의 산에서 수 백년이나 된 나무들을 마구 베어다 썼다. 첫해에는 세를 걷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임금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수세라는 명목으로 보세를 징수하였다. 일 두락에 상답은 이두, 하답은 일 두씩을 받아 현재의 이평면과 부안군 백산면에 700여 석을 쌓아놓는 등 폭정을 일삼았다. 동학농민혁명의 대의를 받들어 길이 기념 새 만석보는 너무 높아서 홍수가 나면 냇물이 범람하여 상류의 논들은 피해를 입었다. 보세를 줄여 달라고 한 농민들은 관아에서 매를 맞았다. 이에 분개한 농민들은 1894년 1월에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만석보로 달려가 헐어버리고 말았다. 이는 동학농민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1973년 5월 11일 갑오동학혁명기념사업회가 이곳에 2.5m의 만석보유지비(萬石洑遺址碑)를 건립하였다. 이평에서 신평리 쪽으로 2.8㎞ 정도 가면 왼쪽 둑길 위에 있다. 이 유지비를 세운 것은 불의에 항거하던 선열들의 높은 뜻을 되새기며 나아가서는 동학농민혁명의 대의를 받들어 길이 기념하고자 하기 위해서이다.

전봉준장군 피체지

2005년 5월 복원한 전봉준장군 피체지는 19세기말 조선의 사회적 모순과 외세의 침탈로 인한 피해를 극복하기 위한 동학농민혁명의 마지막 장소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 역사적 현장이다. 동학농민혁명 정신인 개혁정신과 민족 자주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건립되었다. 전봉준장군이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고 충남 계롱산에 머물 때, 스님 한 분이 "재기에 성공하려면 계룡산과 경천을 피해라"라고 하였다. 그 후 장군이 추격을 피해 피노리에 숨어들었는데, 현상금에 눈이 먼 부하가 전봉준을 밀고하여 붙잡히고 말았다고 한다. 피노리 뒤에 있던 산 이름이 계룡산이었고, 부하의 이름이 경천이었으나 전봉준이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봉준장군 피체지 전시관에서 역사유적을 살펴볼 수 있고, 피체지 주변에 대법원 가인 연수관, 훈몽재, 낙덕정 등 문화유산이 가득해 문화유산 답사코스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녹두관(농촌생활체험관) 은 규모가 다른 5개의 객실과 다목적실, 샤워실, 휴게실, 체육시설 등 최대 100여명까지 숙박할 수 있는 콘도형 시설을 갖추고 있어 가족단위 방문객과 청소년들의 방문이 늘어나고 있다. 또한 복분자 체험, 다슬기체험 등 시골생활을 만끽할 수 있는 농촌생활체험이 가능해 도시민들의 자연체험의 장이 되고 있으며 인근 강천산 군립공원과 산림박물관, 장류박물관 등 관광코스로도 인기를 얻고 있다.

전주한옥마을

전주한옥마을이란 예향 전주의 풍류를 한 눈에 느낄 수 있는 풍남동,교동일대의 한옥가옥촌이다. 전통한옥 700여채를 비롯 전주전통문화센터,전주한옥생활체험관,전주전통술박물관,전주전통공예품전시관 및 명품관,경기전,풍남문,오목대 등이 이웃에 있으며, 선조들의 숨결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한옥마을의 유래] 을사늑약(1905년)이후 대거 전주에 들어오게 된 일본인들이 처음 거주하게 된 곳은 서문 밖, 지금의 다가동 근처의 전주천변이었다. 서문 밖은 주로 천민이나 상인들의 거주지역으로 당시 성안과 성밖은 엄연한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 성곽은 계급의 차이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존재했던 것이다. 양곡수송을 위해 전군가도(全郡街道)가 개설(1907년)되면서 성곽의 서반부가 강제 철거 되었고, 1911년말 성곽 동반부가 남문을 제외하고 모두 철거됨으로써 전주부성의 자취는 사라졌다. 이는 일본인들에게 성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실제로 서문 근처에서 행상을 하던 일본인들이 다가동과 중앙동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1934년까지 3차에 걸친 시구개정(市區改正)에 의하여 전주의 거리가 격자화되고 상권이 형성되면서, 서문일대에서만 번성하던 일본 상인들이 전주 최대의 상권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 1930년을 전후로 일본인들의 세력확장에 대한 반발로 한국인들은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인 주택에 대한 대립의식과 민족적 자긍심의 발로였다. 1930년대에 형성된 교동, 풍남동의 한옥군은 일본식과 대조되고 화산동의 양풍(洋風) 선교사촌과 학교, 교회당 등과 어울려 기묘한 도시색을 연출하게 되었다. 오목대에서 바라보면 팔작지붕의 휘영청 늘어진 곡선의 용마루가 즐비한 명물이 바로 교동, 풍남동의 한옥마을인 것이다. [주요행사] 매주 차없는 거리운영 공예품 전시판매, 문화행사 개최 한국전통문화아카데미 운영 및 체험학교 운영 외국인대학생 학점이수제, 원어민교사 한국문화체험, 주한미군한국 전통체험, 다문화가정 한국문화이해, 재외동포한국문화체험 등
여행해결사 '1330 관광통역안내'

내·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다양한 국내여행 정보를 안내하는 전화상담 및 실시간 문자채팅 서비스

* 한국관광공사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