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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고창] 동학역사여행 (1박2일)

코스 중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말목장터와 감나무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만석보유지비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전봉준 생가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동학농민혁명 기포지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도솔암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고인돌 박물관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고창읍성의 대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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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2일 동학역사여행 유적지 체험 학습 남부권
여행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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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소개
  • 동학농민혁명기념관
  • 말목장터와 감나무
  • 만석보유지비
  • 전봉준 생가
  • 동학농민혁명 기포지
  • 도솔암
  • 고인돌 박물관
  • 고창읍성

[1일] 동학농민혁명 기념관/황토현 전적지 → 말목장터/만석보/전봉준장군 고택 탐방→ 숙박
[2일] 무장기포지(동학농민혁명 기포지) →고창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 답사 → 병바위, 책바위 → 중식 → 고인돌 박물관/통제사 이순신 명문이 있는 고인돌 →고창읍성

만석보유지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에 있는 조선 말기의 보 자리로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되었다. 신태인에서 고부로 가는 약 4㎞ 지점의 동진강을 건너는 다리 하류에 보 뚝을 쌓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원래 만석보는 정읍천과 태인천의 상류 지점에 배들평 농민들이 설치하였다. 이 만석보는 예동보, 광산보라고도 불렀는데, 가뭄이 심해도 이 보에서 물을 끌어다 쓰는 배들평은 흉년 없이 농사를 지었다고 해서 만석보라고 불렀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에 반기 그럼에도 1893년(고종30) 고부군수 조병갑이 세금을 거두기 위해 만석보 바로 아래에 새로운 보를 일부러 쌓았다. 조병갑은 농민들을 강제로 징발하여 부역을 시키고 남의 산에서 수 백년이나 된 나무들을 마구 베어다 썼다. 첫해에는 세를 걷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임금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수세라는 명목으로 보세를 징수하였다. 일 두락에 상답은 이두, 하답은 일 두씩을 받아 현재의 이평면과 부안군 백산면에 700여 석을 쌓아놓는 등 폭정을 일삼았다. 동학농민혁명의 대의를 받들어 길이 기념 새 만석보는 너무 높아서 홍수가 나면 냇물이 범람하여 상류의 논들은 피해를 입었다. 보세를 줄여 달라고 한 농민들은 관아에서 매를 맞았다. 이에 분개한 농민들은 1894년 1월에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만석보로 달려가 헐어버리고 말았다. 이는 동학농민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1973년 5월 11일 갑오동학혁명기념사업회가 이곳에 2.5m의 만석보유지비(萬石洑遺址碑)를 건립하였다. 이평에서 신평리 쪽으로 2.8㎞ 정도 가면 왼쪽 둑길 위에 있다. 이 유지비를 세운 것은 불의에 항거하던 선열들의 높은 뜻을 되새기며 나아가서는 동학농민혁명의 대의를 받들어 길이 기념하고자 하기 위해서이다.

전봉준 생가

녹두장군 전봉준 선생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킬 당시 거주하였던 집 전봉준 선생은 조선왕조(朝鮮王朝) 철종(哲宗) 6년(1855)에 이 지방의 양반 가문에서 출생, 고종(高宗) 27년(1890)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서당(書堂) 훈장(訓長)으로 있었다. 당시 전국의 농촌은 일부 탐관오리(貪官汚吏)의 학정(虐政)으로 농민들의 원성(怨聲)이 높아지고 있었으며, 이곳 고부군(古阜郡) 역시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만석보(萬石洑) 수세 (水稅) 강제징수 등 학정에 시달린 농민들의 생활은 피폐하고 원성이 높았다. 이 때 선생은 고부군(古阜郡)의 동학 접주(接主)로 분노에 찬 농민들과 동학교도의 조직을 이용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保國安民)의 구호를 내세우고 동학운동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고종 31년(高宗 1894) 갑오 동학(甲午 東學) 혁명(革命) 당시 전봉준(全琫準 1854~1895) 이 살았던 오두막집으로 흙담 4칸 집이다. 그런데 서편으로 한칸을 근래에 붙여 지은 것으로 원래는 방 1칸, 광 1칸, 부엌 1칸으로 당시 우리나라 가난한 농민들이 살았던 전형적인 가옥 형태이다. 이 고택(古宅)은 길이 보존하기 위하여 정읍시에서 1974년에 국비와 군비로 크게 수리한 집이다. 정면 4칸, 측면 1칸의 안채(초가)는 높이 15㎝의 잡석의 출대 위에 세워졌다. 큰방과 윗방은 장지로 칸막이가 되어 필요한 경우 공간으로 터놓을 수 있으며 천장은 두 가지 다 연등 천장이다. 출처_정읍시문화관광홈페이지

도솔암

도솔암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에 있는 조선 후기 선운사 도솔암의 지장보살상을 안치한 불전으로 내원궁에는 미륵보살이 장차 부처가 되어 세상을 제도할 때를 기다리며 머물고 있다고 전한다. 도솔암 소개 동백과 꽃무릇으로 유명한 선운사의 산내 암자이다. 동, 서, 남, 북, 상, 하 여섯 개의 도솔암이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상, 하, 북 세 개만 남았다가 현재는 북도솔암을 중심으로 통합되었다. 지장보살좌상과 마애불 등의 보물이 있다. 선운사사적기에 따르면 백제시대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도솔암에 얽힌 전설은 이와 배치된다. 신라 진흥왕이 이곳에서 미륵삼존불의 꿈을 꾸고 선운사와 함께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정확한 내력이야 알 수 없지만 이 암자는 '도솔'이라는 이름에서도 보이듯 미륵신앙과 뿌리가 닿아 있다. 현존 당우로 대웅전, 내원궁, 나한전, 요사 등이 있다. 내원궁에는 보물 제280호로 지정된 지장보살좌상이 있다. 도솔암 서쪽 거대 암벽에는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보물 제1200호이다. 천연기념물 제354호 장사송 도솔암으로 향하다 보면 또 하나의 천연기념물을 만날 수 있는데, 천연기념물 제354호인 장사송이 그것이다. 하나의 나무에서 2개가 갈라져 수려한 반송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사송은 도솔암으로 오르는 길에 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볼거리다. 보물 제1200호 도솔암 마애불 보물 제1200호인 도솔암 마애불의 모습, 정확한 명칭은 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으로, 선운사 도솔암 내원궁이 있는 칠송대라는 암봉의 남벽 단애에 조각된 거대한 불상이다. 보물 금동지장보살좌상 고창 선운사 도솔암 금동지장보살좌상(高敞 禪雲寺 兜率庵 金銅地藏菩薩坐像)은 청동 불상 표면에 도금한 불상으로 선운사 도솔암에 모셔져 있다. 머리에는 두건(頭巾)을 쓰고 있는데, 고려 후기의 지장보살 그림에서 보이는 양식이다.

고인돌 박물관

고인돌 박물관 개요 우리나라에는 약 30,00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고, 그 중에서 고창에는 약 2,000여 기가 있으며, 고창고인돌유적은 세계적으로도 가장 밀집도가 높고, 다양한 형식의 고인돌이 산재해 있는 특색이 있다. 고인돌 박물관 소개 우리나라에는 약 30,00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고, 그 중에서 고창에는 약 2,000여 기가 있으며, 고창고인돌유적은 세계적으로도 가장 밀집도가 높고, 다양한 형식의 고인돌이 산재해 있는 특색이 있다.고창고인돌유적은 1965년 문화재 지표조사를 시작으로 수차례의 발굴 및 지표조사, 국제학술 심포지움 등을 개최하여 역사적 고증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1994년 12월 문화재로 지정(사적 391호)되었고, 2000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은 고창고인돌유적을 더욱 체계적으로 보존 전승시켜 후세의 산 교육장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우리군에서는 2004년 12월에 고창고인돌박물관의 시작을 알리는 첫 삽을 들어, 2008년 9월 25일 개관하게 되었다. 고창고인돌박물관은 청동기시대의 각종 유물 및 생활상과 세계의 고인돌문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기에 여러분들에게 최고의 감동과 만족을 드릴 것이며, 우리 역사의 바탕이 되었던 선사인들이 남긴 삶의 흔적을 찾아 수년간 심혈을 기울여 탄생한 국내 유일의 고창고인돌박물관이 여러분에게 아득한 시절의 옛 이야기를 들려 드릴 것이다. 편안한 학습과 정신적인 휴식을 드리는 고창고인돌박물관에서 무한한 선사인의 숨결을 느껴보시기 바란다. 해설이 있는 고인돌 박물관 역사여행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고인돌 박물관을 둘러볼 수 있다. 청동기 시대의 유물 및 생활상, 고인돌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담고 있어 시간여행을 하는 듯 생동감이 넘친다. 새롭게 단장한 고인돌 박물관 2층 고인돌을 운반하는 고창 선사인들의 모습을 실물크기로 재현한 모습과 청동기시대의 움집제작, 도구제작, 농경생활, 운곡리 고인돌 모습과 고창 선사인들의 삶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새롭게 단장한 대형 빔프로젝트 영상으로 관람할 수 있다. 2층 전시관 전체 360도 모든 공간을 활용하여 실감나게 표현하여 그때 당시의 삶을 충분히 느낄 수 있게 구성하였다.

고창읍성

고창읍성은 자연석으로 만든 성곽으로 사적 제145호로 지정되었으며 모양성이라고도 부른다. 이곳은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석성으로, 고창의 방장산을 둘러싸고 있다. 읍성임에도 불구하고 산을 둘러 성을 쌓았기 때문에 파괴되지 않고 비교적 잘 보존된 성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성이다. 고창읍성은 여자들이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여자들만이 참여하는 성밟기 행사가 매년 이루어진다. 성밟기 놀이는 마을의 평안과 개인의 액막이를 겸하는 목적도 있고, 외적을 방비하는 성을 1년에 한 번씩 점검하고 발로 성을 밟아 견고하게 다지는 목적도 있다. 고창읍성의 성밟기는 머리에 손바닥만한 돌을 이고 3번을 도는데, 한 바퀴를 돌면 다리병이 낫고, 두 바퀴를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를 돌면 극락승천한다는 전설이 있다. 이렇게 쌓인 돌은 유사시에 좋은 무기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성내에는 1871년에 세운 대원군 척화비가 서 있고 읍성 앞에는 조선 후기 판소리의 대가인 신재효의 생가가 있다. 조선시대 고창현의 읍성으로서, 장성 입암산성과 함께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전초 기지의 역할을 하였다. 전래풍속_답성(성밟기)놀이 답성(성밟기)놀이 성을 밟으면 병이 없어 오래살고 저승길엔 극락문에 당도한다는 전설 때문에 매년 답성놀이 행사가 계속되고 있으며, 성밟기는 저승문이 열리는 윤달에 해야 효험이 많다고 하며 같은 윤달이라도 3월 윤달이 제일 좋다고 한다. 또한 엿새날이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라고 하여 초엿새, 열엿새, 스무엿새날에 답성 대열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리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 돌면 극락승천 한다."고 한다. 성을 돌 때는 반드시 손바닥만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돌아 성 입구에 다시 그 돌을 쌓아 두도록 되어 있다. 고창 읍성이 아낙네들의 힘만으로 축조되었다는 전설적 사연으로 답성도부녀자들 만의 전유민속이 되었지만 흙 한줌, 돌 한 개도 모두가 부녀자들의 손과 머리로 운반, 구축되었던 당시의 대역사를 되새겨 보는 뜻으로 돌을 머리에 이고 도는 풍습이 남아있다. 또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도는 관습은 여인네들의 체중을 가중시켜 성을 더욱 단단히 다지게 하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깊은 뜻은 이 성곽의 축성 배경이 왜침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유사시의 석전에 대비하는 유비무환의 예지로서 머리에 인 돌을 성안에 쌓아 두고갔다는 전설도 모두가 호국의 예지를 빛내 주는 이야기들이다. 고창군에서는 답성민속을 기리기 위해 음력 9월 9일인 중양절을 군민의 날로 정하고「모양성제」와 함께 답성놀이를 재현하고 있다. 전래풍속_수문장 재현 수문장 재현 음력 9월 9일을 전후하여 4일간 '모양성제'가 열리며, 이때 조선시대 관군복장을 갖춘 수문장이 고창읍성을 수호하는 장면을 재현된다. 고창 읍성의 성곽 주위에 수십개의 옛 진영 깃발을 꽂아 고을수령(현감)이 재임하던 시절 관아의 위엄을 갖춰놓고 형형색색의 멋진 조선시대 관군복에 칼을 든 수문장과 흑백색의 순라복장에 창을 든 포졸을 공북루에 배치했다. 특히, 스스로 관군이 되어보기를 원하는 관광객을 위해 관리사무소에 관군복을 비치해 놓고 이를 빌려줌으로써 사진촬영을 통해 관군으로서의 체험도 직접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도 마련해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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