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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전주] 동학역사여행 (1박2일)

코스 중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황토현 전적지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전봉준 생가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만석보유지비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전주 풍남문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전주한옥마을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삼례문화예술촌의 대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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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권 1박2일 동학역사여행 유적지 가족 연인 친구 체험 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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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소개
  • 동학농민혁명기념관
  • 황토현 전적지
  • 전봉준 생가
  • 만석보유지비
  • 전주 풍남문
  • 전주한옥마을
  • 삼례문화예술촌

[1일] 동학농민혁명기념관/ 황토현전적지 → 유애사유허비 → 전봉준 고택(사발통문작성체험) → 말목장터와 감나무 → 만석보 (걷기체험)
[2일] 풍남문 / 한옥마을→ 삼례봉기 역사광장 → 삼례문화촌(삼삼예예미미)


○ 전봉준장군 고택
: 갑오동학혁명 당시 전봉준장군이 살았던 오두막집으로 흙담 4칸이며 사적 제 293호로 지정하여 보존되고 있다.


○ 말목장터와 감나무
: 동학농민혁명의 첫 시발점으로 1894년 1월 10일밤 동학농민군이 예동마을에 최초로 집결하여 고부관아로 진격한 곳으로 고부점령후 농민군진지가 되었으며 말목장터의 감나무는 2003년 태풍‘매미’에 쓰려져 지금은 황토현에 있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보존처리한 상태로 전시되어 있고 그 자리에 새 감나무가 심어져 있다.

황토현 전적지

동학농민운동의 첫 승리를 이끌어낸 역사의 현장 정읍의 황토현 전적지는 최초의 전승지로 그때의 역사를 담아내고 있다. 사적 제295호로 지정된 이곳은 당시 태인과 고부를 연결하는 요지이자 동학농민운동이 촉발된 이후 이를 진압하기 위해 온 관군과 맞선 첫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현장이다. 결의를 다진 동학농민군은 황토현에서 관군을 상대로 승리한다. 당시 관군은 2,300명 정도로 숫자는 농민군보다 적었지만, 죽창을 들고 싸우는 농민군과는 비교할 수 없는 화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에 농민군은 스파이를 심고 일부러 전투 장소를 이리저리 바꿔가면서 관군을 지치게 만들다. 그리고 관군이 지친 새벽에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역사를 바꿀 첫 승리를 거두게 된다. 동학농민봉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황토현 동학농민봉기가 동학란 또는 동비(東匪)의 난이라는 이름으로 폄하되어 평가되던 시대인 일제강점기와 1950년대까지는 황토재는 구전으로 기억되어 왔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동학농민봉기가 지닌 반봉, 반외세의 민족운동이었다는 역사적 의의가 새롭게 평가되면서 황토현 전적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1963년에 비로소 황토현에 동학혁명기념탑을 세우기 위한 동학혁명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그해 10월에는 동학농민봉기 당시 농민군의 봉기와 승전을 기념하는 최초의 동학혁명기념탑이 이곳 황토현 전적지에 건립되었다.

전봉준 생가

녹두장군 전봉준 선생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킬 당시 거주하였던 집 전봉준 선생은 조선왕조(朝鮮王朝) 철종(哲宗) 6년(1855)에 이 지방의 양반 가문에서 출생, 고종(高宗) 27년(1890)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서당(書堂) 훈장(訓長)으로 있었다. 당시 전국의 농촌은 일부 탐관오리(貪官汚吏)의 학정(虐政)으로 농민들의 원성(怨聲)이 높아지고 있었으며, 이곳 고부군(古阜郡) 역시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만석보(萬石洑) 수세 (水稅) 강제징수 등 학정에 시달린 농민들의 생활은 피폐하고 원성이 높았다. 이 때 선생은 고부군(古阜郡)의 동학 접주(接主)로 분노에 찬 농민들과 동학교도의 조직을 이용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保國安民)의 구호를 내세우고 동학운동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고종 31년(高宗 1894) 갑오 동학(甲午 東學) 혁명(革命) 당시 전봉준(全琫準 1854~1895) 이 살았던 오두막집으로 흙담 4칸 집이다. 그런데 서편으로 한칸을 근래에 붙여 지은 것으로 원래는 방 1칸, 광 1칸, 부엌 1칸으로 당시 우리나라 가난한 농민들이 살았던 전형적인 가옥 형태이다. 이 고택(古宅)은 길이 보존하기 위하여 정읍시에서 1974년에 국비와 군비로 크게 수리한 집이다. 정면 4칸, 측면 1칸의 안채(초가)는 높이 15㎝의 잡석의 출대 위에 세워졌다. 큰방과 윗방은 장지로 칸막이가 되어 필요한 경우 공간으로 터놓을 수 있으며 천장은 두 가지 다 연등 천장이다. 출처_정읍시문화관광홈페이지

만석보유지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에 있는 조선 말기의 보 자리로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되었다. 신태인에서 고부로 가는 약 4㎞ 지점의 동진강을 건너는 다리 하류에 보 뚝을 쌓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원래 만석보는 정읍천과 태인천의 상류 지점에 배들평 농민들이 설치하였다. 이 만석보는 예동보, 광산보라고도 불렀는데, 가뭄이 심해도 이 보에서 물을 끌어다 쓰는 배들평은 흉년 없이 농사를 지었다고 해서 만석보라고 불렀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에 반기 그럼에도 1893년(고종30) 고부군수 조병갑이 세금을 거두기 위해 만석보 바로 아래에 새로운 보를 일부러 쌓았다. 조병갑은 농민들을 강제로 징발하여 부역을 시키고 남의 산에서 수 백년이나 된 나무들을 마구 베어다 썼다. 첫해에는 세를 걷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임금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수세라는 명목으로 보세를 징수하였다. 일 두락에 상답은 이두, 하답은 일 두씩을 받아 현재의 이평면과 부안군 백산면에 700여 석을 쌓아놓는 등 폭정을 일삼았다. 동학농민혁명의 대의를 받들어 길이 기념 새 만석보는 너무 높아서 홍수가 나면 냇물이 범람하여 상류의 논들은 피해를 입었다. 보세를 줄여 달라고 한 농민들은 관아에서 매를 맞았다. 이에 분개한 농민들은 1894년 1월에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만석보로 달려가 헐어버리고 말았다. 이는 동학농민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1973년 5월 11일 갑오동학혁명기념사업회가 이곳에 2.5m의 만석보유지비(萬石洑遺址碑)를 건립하였다. 이평에서 신평리 쪽으로 2.8㎞ 정도 가면 왼쪽 둑길 위에 있다. 이 유지비를 세운 것은 불의에 항거하던 선열들의 높은 뜻을 되새기며 나아가서는 동학농민혁명의 대의를 받들어 길이 기념하고자 하기 위해서이다.

전주 풍남문

전주를 상징하는 풍남문 전주를 상징하는 전주 풍남문은 원래 전주부성의 4대문 가운데 남문으로 고려 공양왕 원년인 서기 1389년에 전라관찰사 최유경이 전주부성과 함께 창건했다. 건축양태는 조선 후기의 문루 형식으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형태로 지목되고 있다. 원래 도성이나 읍성, 산성 등은 으레 성문이 있기 마련이고 그 위에 문루를 세우는 것이 중요한 형식이자 관례로 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조 영조 43년(1767)에 당시 성내를 휩쓴 정해년 대화로 불타버려 영조 44년(1768) 전라관찰사 홍낙인이 증건했지만 종전처럼 3층루가 아닌 현 모습으로 수축하여 이때부터 풍남문이라 불렀다.1905년 조선통감부의 폐성령에 의해 전주부성 4대문중 풍남문만 제외한 3대문이 동시에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다. 구조를 보면 화강암을 사용하여 조성된 이 탑은 방형(方形)의 이중(二重) 기단석(基壇) 위에 사방 세 칸의 탑을 쌓았다. 초층에는 민흘림형식을 갖춘 네모꼴의 돌기둥을 설치하고, 기둥머리위에는 평방(平枋)과 창방(昌枋)을 올려놓았으며, 각 중앙칸에는 출입구를 만들어 十자모양의 내부로 통하는 통로를 두었고, 탑 내 중앙의 교차되는 중심에는 바른 네모꼴 모양의 찰주(擦柱)가 있다. 특히 초층(初層)에서 주목되는 것은 네모꼴 기둥의 가공한 기법이 민흘림 양식이며, 우주(隅柱)의 경우 귀솟음 기법을 사용한 것이 매우 특이하다. 또 이 탑의 특징은 목조건물에서 공포(拱包)를 가설하였을 것이나, 이 탑에서는 목재와 같이 기교 있게 공포(拱包)를 조각할 수 없으므로 공포양식을 모방한 3단의 층급받침으로 지붕돌을 받치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얇고 넓은데 네 모퉁이가 가볍게 치켜들고 있어서 신라 석탑양식에서는 볼 수 없는 백제 특유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층 이상은 탑신(塔身)이 얕아지고 각 부분의 가구 수법을 약화 시켰으며, 지붕돌은 폭만 줄여 1층과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다. 5층 이상의 층급받침은 정단에서 4단으로 증가되었다. 그리고 각 기둥과 면석, 창방과 층급받침 등을 모두 별개석 으로 엇물림 쌓기를 하고 있다. 1978년 문루 보수과정에서 옹성의 기단이 풍남문 홍예문으로부터 12m 지점에서 발굴됨에 따라 이 기단대로 연장 97.5m의 여담쌓기와 치석 6,856개로서 옹성 1,933㎡를 축조하여 복원하였다. 전주 풍남문의 누대를 겸한 석문은 성벽을 따라 안쪽으로 내밀게 구형을 쌓고, 이 석축 중앙에 통로를 뚫고 통로 내외면에 무지개끝 석물을 쌓아 윗면에 문루를 설치한 것이다. 이 누대는 너비는 동서 23.6m, 남북 10.6m이며 높이는 17.2m에 이른다. 문루의 서편에는 종각이 있고 좌편에는 포루가 있었다. 문루는 2층의 팔각지붕인데 정면, 측면이 모두 3칸이고 윗층의 정면은 3칸이나 측면은 1칸이다. 1980년 종각과 포루, 전주 풍남문 바깥쪽 출성인 옹성을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찾았다. 출처 URL | 전주시문화관광

전주한옥마을

전주한옥마을이란 예향 전주의 풍류를 한 눈에 느낄 수 있는 풍남동,교동일대의 한옥가옥촌이다. 전통한옥 700여채를 비롯 전주전통문화센터,전주한옥생활체험관,전주전통술박물관,전주전통공예품전시관 및 명품관,경기전,풍남문,오목대 등이 이웃에 있으며, 선조들의 숨결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한옥마을의 유래] 을사늑약(1905년)이후 대거 전주에 들어오게 된 일본인들이 처음 거주하게 된 곳은 서문 밖, 지금의 다가동 근처의 전주천변이었다. 서문 밖은 주로 천민이나 상인들의 거주지역으로 당시 성안과 성밖은 엄연한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 성곽은 계급의 차이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존재했던 것이다. 양곡수송을 위해 전군가도(全郡街道)가 개설(1907년)되면서 성곽의 서반부가 강제 철거 되었고, 1911년말 성곽 동반부가 남문을 제외하고 모두 철거됨으로써 전주부성의 자취는 사라졌다. 이는 일본인들에게 성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실제로 서문 근처에서 행상을 하던 일본인들이 다가동과 중앙동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1934년까지 3차에 걸친 시구개정(市區改正)에 의하여 전주의 거리가 격자화되고 상권이 형성되면서, 서문일대에서만 번성하던 일본 상인들이 전주 최대의 상권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 1930년을 전후로 일본인들의 세력확장에 대한 반발로 한국인들은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인 주택에 대한 대립의식과 민족적 자긍심의 발로였다. 1930년대에 형성된 교동, 풍남동의 한옥군은 일본식과 대조되고 화산동의 양풍(洋風) 선교사촌과 학교, 교회당 등과 어울려 기묘한 도시색을 연출하게 되었다. 오목대에서 바라보면 팔작지붕의 휘영청 늘어진 곡선의 용마루가 즐비한 명물이 바로 교동, 풍남동의 한옥마을인 것이다. [주요행사] 매주 차없는 거리운영 공예품 전시판매, 문화행사 개최 한국전통문화아카데미 운영 및 체험학교 운영 외국인대학생 학점이수제, 원어민교사 한국문화체험, 주한미군한국 전통체험, 다문화가정 한국문화이해, 재외동포한국문화체험 등
여행해결사 '1330 관광통역안내'

내·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다양한 국내여행 정보를 안내하는 전화상담 및 실시간 문자채팅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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