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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역사의 향기 그윽한 전통마을 나홀로 여행

코스 중 태조어진 박물관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경기전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최명희문학관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전주한옥마을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전통술박물관의 대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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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소개
  • 태조어진 박물관
  • 경기전
  • 최명희문학관
  • 전주한옥마을
  • 전통술박물관

어진박물관→경기전→최명희문학관→한옥마을→전통술박물관

경기전

전주한옥마을의 상징 경기전 혼불의 작가 최명희씨는 그의 단편소설 ‘만종’에서 경기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고궁(古宮)의 묵은 지붕 너머로 새파란 하늘이 씻은 듯이 시리다. 우선 무엇보다도 그것에는 나무들이 울창하게 밀밀하였으며, 대낮에도 하늘이 안 보일 만큼 가지가 우거져 있었다. 그 나무들이 뿜어내는 젖은 숲 냄새와 이름 모를 새들의 울음소리며, 지천으로 피어 있는 시계꽃의 하얀 모가지, 우리는, 그 경기전이 얼마나 넓은 곳인지를 짐작조차도 할 수 없었다.” 경기전은 조선왕조를 연 태조의 초상화, 즉 어진을 모시기 위해 태종 10년(1410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전주, 경주, 평양 등의 어진 봉안처를 처음에는 어용전이라 불리었는데, 태종 12년(1412년)에 태조 진전(眞展)이라 하였다가 세종 24년(1442년)에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승전이라 각각 칭하였다. 경기전은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으나 광해군 6년(1614년)에 중건되었다. 경기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 봉안과 함께 전주사고(史庫)가 설치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안고 있다. 전주사고가 조선의 역사를 지켜냈기에 그러하다. 풍경이 아름다운 경기전  경기전 안에는 많은 역사적 유적과 유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경기전 입구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있는데, 이 앞을 지날 때에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태조 이성계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함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전국 4곳에 보존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이곳 전주서고의 조선왕조실록만은 다행히 화를 면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은 역사적, 문화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가까운 곳에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2층에는 차를 마실 공간도 있으니 잠깐 쉬어가는 것도 좋다. 가을 풍경이 특히 아름다운 경기전, 경기전은 주변 경관이 수려해 역사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 주목받는 곳이기도 하다. 출처 URL | 전주시문화관광

최명희문학관

아무리 생애가 멀리 멀리 흘러갈지라도 자기 존재의 근원지를 떠올릴 때면 까닭도 없이 핏줄이 저린다. 작가 최명희(1947-1998). 고단한 삶의 여울, 징검다리 둥지와 같았던 전주의 집들은 지금 깡그리 사라졌지만, 최명희문학관은 생가(生家) 가까운 자리에서 작가가 살아온 기억의 마디마디를 역력히 담고 있다. 문학관은 세상을 떠난 작가가 이 세상에 다시 살러 온 집이기 때문이다. 최명희문학관은 진달래와 철쭉이 차례로 피던 2006년 봄, 그가 나고 자란 전주한옥마을에 세워졌다. 작가가 그토록 귀히 여겼던 경기전과 전동성당, 오목대와 이목대가 있는 곳이다. 아늑한 마당과 소담스런 공원이 있는 문학관은 주 전시관인 독락재(獨樂齋)와 강연장·기획전시장인 비시동락지실(非時同樂之室)로 이뤄졌다. “독락”이란 당호는 홀로 자신과 대면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즐기는 경지에서 이룩한 문학의 높은 정신을 기리는 의미다. “비시동락”은 말 그대로 따로 때를 정하지 않고 노소동락(老少同樂), 교학상전(敎學相傳)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최명희와 전주, 문학과 전주, 문화와 전주가 만나는 자리들로 이곳은 늘 부산하다. 작가를 중심으로 구성한 전주의 문학관은, ‘내 마음의 전주에 그 옛날의 고향 하나를 오밀조밀 정답게 복원해 보고 싶’어 했던 작가의 세세한 삶의 흔적과 치열했던 문학 혼을 엿볼 수 있으며, 고향에 대한 애정까지 확인할 수 있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작가의 원고와 지인들에게 보낸 엽서·편지들을 비롯해 『혼불』이나 생전의 인터뷰·문학강연 등에서 추려낸 말들로 이뤄진 동영상과 각종 패널을 만날 수 있다. 한 줄 한 줄 눈이 따르면 곧 마음이 동한다. 최명희는 아름다운 조각품을 볼 때, 그 아름다운 조각품이 태어나기 위해 떨어져나간 돌이나 쇠의 아름답고 숭고한 희생을 우러르며 가슴 아파했고, 흐드러지게 피어 아름다운 동백꽃만큼 그 둥치에 낀 이끼의 생명력을 소중히 여겼다. 문학관 운영은 이러한 그의 마음에서 시작된다. 시민과 함께 연구하고 학습하며 감동을 주고받는 도시형·시민밀착형 문학관, 사당처럼 적막한 곳이 아니라 문학강연·토론회·세미나·문학기행 등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생생하게 살아서 뜀박질하는 문학 생산의 거점이며, 단순히 한 개인의 기념관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문학관, 민족혼이 춤추는 문학관으로 재현되고 있다.

전주한옥마을

전주한옥마을이란 예향 전주의 풍류를 한 눈에 느낄 수 있는 풍남동,교동일대의 한옥가옥촌이다. 전통한옥 700여채를 비롯 전주전통문화센터,전주한옥생활체험관,전주전통술박물관,전주전통공예품전시관 및 명품관,경기전,풍남문,오목대 등이 이웃에 있으며, 선조들의 숨결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한옥마을의 유래] 을사늑약(1905년)이후 대거 전주에 들어오게 된 일본인들이 처음 거주하게 된 곳은 서문 밖, 지금의 다가동 근처의 전주천변이었다. 서문 밖은 주로 천민이나 상인들의 거주지역으로 당시 성안과 성밖은 엄연한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 성곽은 계급의 차이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존재했던 것이다. 양곡수송을 위해 전군가도(全郡街道)가 개설(1907년)되면서 성곽의 서반부가 강제 철거 되었고, 1911년말 성곽 동반부가 남문을 제외하고 모두 철거됨으로써 전주부성의 자취는 사라졌다. 이는 일본인들에게 성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실제로 서문 근처에서 행상을 하던 일본인들이 다가동과 중앙동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1934년까지 3차에 걸친 시구개정(市區改正)에 의하여 전주의 거리가 격자화되고 상권이 형성되면서, 서문일대에서만 번성하던 일본 상인들이 전주 최대의 상권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 1930년을 전후로 일본인들의 세력확장에 대한 반발로 한국인들은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인 주택에 대한 대립의식과 민족적 자긍심의 발로였다. 1930년대에 형성된 교동, 풍남동의 한옥군은 일본식과 대조되고 화산동의 양풍(洋風) 선교사촌과 학교, 교회당 등과 어울려 기묘한 도시색을 연출하게 되었다. 오목대에서 바라보면 팔작지붕의 휘영청 늘어진 곡선의 용마루가 즐비한 명물이 바로 교동, 풍남동의 한옥마을인 것이다. [주요행사] 매주 차없는 거리운영 공예품 전시판매, 문화행사 개최 한국전통문화아카데미 운영 및 체험학교 운영 외국인대학생 학점이수제, 원어민교사 한국문화체험, 주한미군한국 전통체험, 다문화가정 한국문화이해, 재외동포한국문화체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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