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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김제,부안,군산,익산] 천혜의 비경 고군산군도 유람여행

코스 중 전주한지박물관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김제 벽골제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내소사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새만금 홍보관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진포해양테마공원의 대표 이미지
코스 중 미륵사지의 대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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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권 2박3일 체험형 테마코스 체험 학습
여행후기
☆☆☆☆☆ (0)건
코스소개
  • 전주한지박물관
  • 김제 벽골제
  •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
  • 내소사
  • 새만금 홍보관
  • 진포해양테마공원
  • 미륵사지

수학여행코스

○ 1일
학교출발 → 중식 → 전주 한옥마을 관람 → 한지박물관 관람 →김제 벽골제 체험장 관람 → 숙소(김제) → 석식 → 자유시간 → 취침
○ 2일
기상 → 조식 → 내소사 관람 → 부안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 → 중식 → 새만금방조제 관람(아리울예술창고 공연) 또는 고군산군도 유람선 → 진포해양 테마공원 → 숙소 → 석식 → 학교 자체 프로그램 운영 또는 자유시간 → 취침
○ 3일
기상 → 조식 → 금강 황포돛대, 생태체험 → 익산 미륵사지관람 → 중식 → 학교 이동

코스소개

전주·완주·김제·부안·군산·익산 등 전북특별자치도 6개 시·군을 돌며 나와 너와 우리의 의미를 생명의 귀함을 통해 인식하는 여정이다.
우리나라 농경문화의 근원지인 김제 벽골제, 국내 최대의 망원경으로 우주를 관측하는 부안 청림청소년수련원, 녹색에너지의 힘을 확인 하는 부안 신재생에너지테마파크, 철새들이 선택한 풍요의 땅 군산·익산의 금강하구, 바다를 메워 건설한 세계에서 가장 긴 33.9㎞의 새만금방조제 등 생명의 근원을 가까이에서 지켜본다.

김제 벽골제

벽골제 벽골제는 우리나라 최고 최대의 저수지로 『삼국사기』에는 신라 흘해왕 21년(330)에 “처음으로 벽골제를 만들었는데, 둘레가 1천 8백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이 지역이 신라 땅이 아닌 백제의 땅이었으므로 나중에 연도를 고쳐서 신라가 만든 것처럼 보이도록 해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실제로 만들어진 때는 백제 11대 비류왕 27년(330)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후 신라 원성왕 6년(790)과 고려 현종 및 인종 21년(1143)에 고쳐 쌓은 후, 조선 태종 15년(1415)에 다시 쌓으나 세종 2년(1420)에 심한 폭우로 유실되었다. 지금 유적에는 일직선으로 약 3㎞ 정도의 둑만이 남아있는데, 일제강점기인 1925년 ‘동진토지개량조합’에서 이 둑을 농사짓는데 필요한 물을 대는 통로로 고쳐 이용하면서 그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다. 둑의 북쪽에는 조선시대에 벽골제를 다시 쌓고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 세운 비석이 있는데, 닳아서 글을 알아보기 어렵다. 1975년에는 저수지 물의 양을 조절하던 수문이 있던 자리 2곳을 발굴조사하였는데, 그 결과 대규모의 높은 수준의 측량기술이 이용된 공사였던 것이 밝혀졌다. 벽골제는 단순히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라는데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당시에 이미 이러한 저수지 축조가 가능할 정도의 고도로 발달된 토목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과학기술사에서도 획기적인 사실을 제공해 주는 유적이다. 현 벽골제단지에는 벽골제와 농경문화를 대주제로 전시 및 자료수집과 연구조사를 진행하는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 김제를 발원지로 일제강점기를 다룬 소설 아리랑의 자료를 전시하는 아리랑문학관, 그리고 전북미술계의 거목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친 나상목선생의 벽천미술관과 김제 우도농악관 등 문화시설과 각종 야외전시가 있다. 사적 벽골제와 각종 박물관들은 오래된 고을, 김제의 지역정체성 및 문화를 대내외에 천명하는 문화공간이자 휴식공간의 역할을 수행하며 문화백년지대계 김제를 표방하고 있다. 출처 URL | 김제시문화관광

내소사

사람과 자연과의 동화 능가산내소사 관음봉 아래에 곰소만의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며 자리하고 있는 천년고찰 내소사 소사모종 관음봉 아래에 곰소만의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며 자리하고 있는 천년고찰 내소사 경내에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해질 무렵 어둠을 뚫고 고즈넉한 산사에서 울려퍼지는 저녁 종소리에 신비로운 정경을 제3경이라 친다. 무더웠던 여름 어느날 새벽이라도 좋았을 것이다. 흰눈이 가득내렸던 겨울이라도 운치가 있었을 것이다. 달콤했던 20대 첫사랑의 손을 잡고 처음 걸었어도 행복했을 것이며, 40대 늦은 오후 아내의 손을 잡고 걸어도 행복했을 것이다.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전나무길 위에 새벽의 빛이 내려앉아도 그만의 달콤함이 스며들었을 것이며, 한해의 마지막 달 눈밭의 전나무길도 고즈넉하고 좋았을 것이다.   내소사는 변산반도의 남쪽, 세봉 아래에 자리한 사찰로 삼면이 산으로 포근하게 둘러싸인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내소사는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차분한 사찰로,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 앞까지 이어지는 전나무 숲길이 유명하다. 약 1km 에 못 미치는 길이지만 가늘고 곧게 뻗은 전나무들이 시원한 산책로를 만들어 놓았다. 이 전나무 숲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천왕문까지의 짧은 길은 단풍나무와 벚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어 봄, 가을이면 환상적인 장면을 만들어낸다.   경내로 들어서면 대웅보전이 단연 유명한데, 대웅보전 자체가 보물 제291호로 지정되어 있을 뿐 아니라 대웅보전의 꽃문살 역시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대웅보전의 연꽃과 국화 문양의 꽃 창살 사방연속무늬는 내소사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데, 우리나라 장식 문양 중 최고로 평가되는 꽃 창살은 고유의 나무빛깔과 나뭇결 위에 그대로 수놓아져 있어 절제의 미가 돋보인다.   햇살이 좋은 날, 내소사를 돌아보고 전나무길을 걸어나오면 마음까지 정화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절이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천왕문에 이르기까지 전나무 숲길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침엽수 특유의 맑은 향내음은 속세의 찌든 때를 씻어내기에 적격이며, 사색하기에도 더 없이 좋은 공간이다. 내소사 대웅보전 대웅보전 안에는 석가 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고, 불화로는 영산후불탱화, 지장탱화 및 후불벽화로 '백의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는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 인간의 솜씨를 넘은 성스러운 모습이다. 관음보살님의 눈을 보면서 좌 우로 왔다 갔다 해보면 관음보살님 눈동자가 내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움직이는데(물론 사람에 따라 안보일 수도 있다.), 눈동자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 속설이 있다. 내소사 단청 부안 내소사 대웅보전은 보물 제291호로 규모는 정면 3칸·측면 3칸으로, 다포 양식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건물의 앞쪽에 달린 문살은 꽃무늬로 조각하였다. 단청은 전체적으로 내·외부 모두 금단청 형식으로 용문양을 비롯해 학, 봉황, 주악천인, 매화도 등이 그려진 계풍별화와 나한도가 그려진 판벽화, 그리고 불상이 표현된 포벽화 등 다양한 소재의 문양과 회화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백의관음보살좌상 대웅보전 삼존불을 모신 불단 후불벽면에는 전체 가득히 백의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며, 이 벽화는 국내에 남아 있는 백의관음보살좌상으로는 큰 것이어서 더욱 귀중하다. 백의관음보살좌상의 눈을 보고 걸으면 눈이 따라오는데 그 눈을 바라보면서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대웅보전의 꽃문살 내소사 대웅보전의 꽃 문살은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 우리나라 장식무늬의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꽃살은 나뭇결이 그대로 도톰하게 살이 오른 것 같아 더욱 아름답다. 대웅보전의 절묘한 꽃잎 문살은 꽃 한잎 한잎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며 그 예술성은 다른 곳에서 예를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독특하고, 여섯 잎 보상화를 조각하며 기묘하게 맞추어 나간 연속문양 솜씨는 감탄을 부른다. 고려동종 고려 고종 9년(1222)에 내변산에 소재한 청림사에서 제작되었으나 청림사가 폐사된 후 오랫동안 매몰되었다가 조선 철종 1년(1850) 내소사에 옮겨진 것으로 전형적인 고려후기의 동종이다. 영산회괘불탱 야외에서 큰 법회나 제를 지낼 때 걸어놓고 예배하는 괘불(掛佛)로서, 1700년(숙종 26)에 제작된 영산회상 괘불이다. 영산회상이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와 제자들을 그린 불화를 말하는데, 중앙에는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두른 거대한 석가모니불이 붉은 법의를 걸치고,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내리고 왼손은 배부근으로 올리고 서 있다. 이 괘불탱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 앞쪽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뒤쪽 좌우에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및 다보여래, 아미타여래 등이 모두 석가모니를 향하여 시립하고 있다. 이 괘불탱은 각 존상의 광배 안에 존상의 명칭을 적어 놓아 이후 다른 괘불의 존상 명칭을 밝히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백지묵서묘법연화경 백지묵서묘법연화경은 1415년(태종 15) 이씨 부인이 남편 유근(柳謹)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제작한 묘법연화경의 필사본으로 모두 7권 7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표지는 감지(감색으로 물들인 종이)에 금니(금박의 가루로 그림이나 글씨를 쓰는데 쓰임)로 외곽을 두르고 내부의 4매의 연화문을 배치한후 그 안에 책이름을 쓰고 백지 위에 법화경의 본문을 써 내려갔으며, 글씨는 한면에 6행씩으로 한 행에 17~19자의 행당 자수는 일정치 않으나 제 1권에는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부처님과 권속들을 섬세하고 정교한 필선과 능숙한 솜씨로 그려낸 변상도가 있다. 건실한 필치가 돋보이는 이 사경은 조선시대 초기의 사경으로서 완전하게 보존된 보기 드문 일품에 속한다 하겠다 . 현재 불교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진포해양테마공원

소개 군산 내항의 진포해양테마공원은 고려말 최무선 장군이 최초로 화포를 이용하여 왜구를 물리친 진포대첩을 기념하며 미래의 주역인 어린이들의 체험학습의 장으로 활용, 올바른 역사의식 확립과 자긍심 고취를 위해 당시 전투현장이었던 내항일대에 육․해․공군의 퇴역장비 13종 16대를 전시하여 공원을 조성하였습니다. 위봉함은 1945년 1월 16일 미국에서 상륙함(LST)으로 건조되어 14년간 미 해군의 주력함정으로 2차대전당시 연합군의 상륙작전 등에 참전한 군함입니다. 1959년 5월 19일 우리나라에 인계되어 ‘LST676위봉함’으로 명명된 후, 대한민국의 주력 상륙 함으로써 다양한 작전지역에서 상륙작전과 수송작전의 임무를 수행하였다고 합니다. 퇴역군장비이긴 하지만 엄연히 현대전에서 사용되었던 군 장비들이 야외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해경정, 수륙양용장갑차, 자주포, F-86전투기와 훈련기 등 육해공의 다양한 장비가 한자리에 모여있는데요. 각 장비마다 전방에 간략한 제원과 설명이 준비되어 있어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 흥미로운 관람이 가능합니다. 군산항 개항 연혁 1899. 05. 01군산항 개항 1925 ~ 1933 부잔교 3기 건설 1938. 01. 01 장항항 개항 1944 ~ 1961부잔교 2기 건설 1974 ~ 1979제1부두 건설(2만톤급 1선석, 1만톤급 2선석) 1985 ~ 1990제2부두 건설(2만톤급 1선석, 1만톤급 2선석) 1990 ~ 1997군․장신항만북측도류제 건설(7.1km) 1992 ~ 1995제3부두 건설(2만톤급 3선석) 1995 ~ 2000군․장신항만북측도류제 건설(2.9km) 1995 ~ 1997제4부두(자동차부두)건설 (2만톤급 1선석) 1997 ~ 2004군장신항만북방파제 건설(3.0km) 1998 ~ 2001장항항 안벽건설(1만톤급 2선석) 1999    군산개항 100주년 기념행사 1999 ~ 2004제6부두 건설(5만톤급 4선석) 2009    군산개항 110주년 진포대첩 진포대첩(鎭浦大捷)은 지금으로부터 626년 전 금강 하구의 진포(鎭浦)에 침입해 온 왜구(倭寇)들을 고려의 수군(水軍)이 격퇴한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이곳 군산(群山)의 현장에서 있었던 해전(海戰)에서의 빛나는 승리로 그토록 오랫동안 고려를 괴롭혀 왔던 해적집단 왜구의 기세는 마침내 꺾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 뒤의 이성계(李成桂)의 황산대첩(荒山大捷)과 정지(鄭地)의 남해대첩(南海大捷)도 이 진포대첩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진포의 전투는 1380년(우왕 6년) 8월 왜구들이 5백척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진포에 침입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1만명 이상의 정예 병력으로 추정되는 그들은 큰 밧줄로 배들을 서로 연결하여 묶어 놓고 군사를 나누어 이를 지키게 한 다음, 대부대를 거느리고 연안에 상륙하여 주변의 고을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했습니다. 이들 왜구의 야만적인 약탈로 인하여 우리 백성들의 시체가 산과 들을 덮었으며, 약탈한곡식을 배로 실어 나르면서 흘린 쌀이 한 자 두께가 넘게 땅에 수북이 흘렸을 만큼 그 피해가 매우 컸다고 [고려사(高麗史)]는 당시의 치열했던 상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들 왜구를 진압하기 위하여 나선 고려의 지휘사령부는 해도원수(海道元帥) 나세(羅世)와 심덕부(沈德符), 그리고 최무선(崔茂宣)이었습니다. 이들은 전함 1백척을 거느리고 진포로 달려와 왜구를 공략하였습니다. 이 때 최무선은 자신이 만든 화포(火砲)를 사용하여 함포사격을 통해 왜구의 배들을 불태워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진포해전은 세계 해전사에 처음으로 화포를 사용한 전투였으며, 화력 기동 전술과 해상 포격전의 시초를 열어놓은 역사적인 해전이었습니다. 전시장비 해군-2대 : LST(1대), 상륙장갑차(1대) 육군-6대 : M-548(2대), M-48(2대), 자주포(2대) 공군-7대 : F-86, UH-1B, O-2A, F-5F, C-123K, F-4D, T-41B 해양경비정 : 마니산 273함

미륵사지

미륵사지석탑 기원 미륵사지내에 있는 이 석탑은 미륵사지 서원(西院)에 자리하고 있으며, 국내에 남아 전하는 석탑으로는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탑이다. 현재 남아있는 층수는 6층이며[현재 보수정비 중], 이 탑의 층수에 대해서 한때는 7층 설이 주장되기도 하였으나 동탑지 주변발굴에서 노반(露盤)이 발견되어 9층이었음이 밝혀졌다. 이 석탑은 목조탑파의 양식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한국 석탑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 미륵사지석탑 구조 구조를 보면 화강암을 사용하여 조성된 이 탑은 방형(方形)의 이중(二重) 기단석(基壇) 위에 사방 세 칸의 탑을 쌓았다. 초층에는 민흘림형식을 갖춘 네모꼴의 돌기둥을 설치하고, 기둥머리위에는 평방(平枋)과 창방(昌枋)을 올려놓았으며, 각 중앙칸에는 출입구를 만들어 十자모양의 내부로 통하는 통로를 두었고, 탑 내 중앙의 교차되는 중심에는 바른 네모꼴 모양의 찰주(擦柱)가 있다. 특히 초층(初層)에서 주목되는 것은 네모꼴 기둥의 가공한 기법이 민흘림 양식이며, 우주(隅柱)의 경우 귀솟음 기법을 사용한 것이 매우 특이하다. 또 이 탑의 특징은 목조건물에서 공포(拱包)를 가설하였을 것이나, 이 탑에서는 목재와 같이 기교 있게 공포(拱包)를 조각할 수 없으므로 공포양식을 모방한 3단의 층급받침으로 지붕돌을 받치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얇고 넓은데 네 모퉁이가 가볍게 치켜들고 있어서 신라 석탑양식에서는 볼 수 없는 백제 특유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층 이상은 탑신(塔身)이 얕아지고 각 부분의 가구 수법을 약화 시켰으며, 지붕돌은 폭만 줄여 1층과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다. 5층 이상의 층급받침은 정단에서 4단으로 증가되었다. 그리고 각 기둥과 면석, 창방과 층급받침 등을 모두 별개석 으로 엇물림 쌓기를 하고 있다. 미륵사지석탑 복원 이 탑은 붕괴 직전에 있는 폐탑으로 남아있는 것을 1915년 일본인들이 보수(?)하여 비교적 탑의 동쪽 부분은 온전하게 남아있으나, 서쪽부분을 시멘트로 덮어 버려 조형미를 잃고 있었다. 1992년 문화재관리국에서 동탑지에서 발견된 탑 부재를 치밀하게 조사하여 동탑을 9층으로 복원 하였다.이 석탑은 본래 9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17세기 이전에 붕괴되었으며 1915년 일본인들이 무너진 부위에 콘크리트로 보강하였고 최근까지 절반이상 무너진 상태로 존속되어 왔다. 그러나 미륵사지석탑은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큰 규모이고, 현존 최고 양식으로 알려져 있으며 1층 내부에 있는 十자형 통로와 심주, 천장 구조 등은 고대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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