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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항일독립운동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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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의 독립운동사를 1, 2, 3관으로 구분하였다.
 

1-항일운동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 외교권을 강탈하고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폐위시켰으며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시켰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일본군에 대항해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1910
년 한일병합조약 강제 체결로 대한제국의 국권이 강탈당하자 우리 민족은 언론출판집회결사를 포함한 모든 자유를 박탈당하고 농민들은 토지를 빼앗겼다.
1918
년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계기로 우리민족은 독립선언을 기획하였다.
1919년 3
1운동은 전 세계에 비폭력 평화적인 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 의지와 불굴의 민족정신을 보여준 민족독립운동이었다.

 

2-일제수탈

익산은 만경강의 풍부한 농업용수값싼 토지가격양질의 토질, 1912년 호남선 개통으로 농경지의 최적의 조건을 갖추어 토지양곡수탈의 최전선이자 경제침략의 현장이 되었다.

특히 이리지역의 오하시농장대장촌의 호소카와농장불이홍업주식회사 등은 300만평 이상의 농지를 소유하는 대지주였다
일본인들은 쌀 수확량을 증산하기 위하여 수로 시설을 개선하여 땅을 개간하고 생산된 쌀은 춘포역을 통해 군산항에서 일본으로 반출시켰다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일본인 농업인을 이주시키고 그 아래 수만명의 한국 소작농을 관리하였으며익옥수리조합은 쌀 생산량 증대를 위한 다는 명목아래 토지 개량을 시행하였고 이에 따른 과다한 공사비와 수세를 부담시켜 지역농민을 몰락시켰다.

 

3-44만세운동

1919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31운동 중 우리지역은 44만세운동으로 정점을 맞았다.

당시 대교농장 앞이자 솜리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남전교회서두교회고현교회제석교회대장교회 등을 주축으로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전개되었다.
1,000
여명 군중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수많은 군중에 위협을 느낀 일본 헌병대가 일본인 농장 관리원까지 동원하여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문용기박영문장경춘박도현서공유이충규 등 6인은 현장에서 순국하고 39명이 체포되었다
국가보훈처를 통해 공훈을 인정받은 익산지역의 독립운동가는 총92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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