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실] 1박 2일 임실 종단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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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소개
  • 임실치즈테마파크
  • 임실향교대성전
  • 죽림암
  • 오수의견공원
  • 임실오수망루
  • 해월암 신포정

[1일] 임실치즈테마파크 → 임실향교대성전 → 이도리석불 → 왜가리서식지 → 죽림암
[2일] 오수의견공원 → 오수망루 → 의견비 → 오수리석불 → 해월암 신포

임실향교대성전

조선시대의 향교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 임실향교 대성전   임실읍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임실∼순창 국도로부터 서쪽으로 약 300m가량 떨어진 향교부락에 위치하고 있다. 1984년 4월 1일 전북특별자치도문화재자료 제26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용요산의 동남쪽 기?인 봉황대와 3.1동산 사이에 위치한 지역이다.   창건 연대와 당시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현 위치에 이건된 것은 1413년(태종 13)이다. 이후의 연혁도 고찰할만한 문헌적 자료가 없으며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주로 조선말 고종 이후의 것뿐이다. 철종 5년(1854)에 김성근 현감에 의하여 대성전이 크게 중수되고 고종 15년(1878)에 다시 교궁이 수리되고 고종 20년(1883) 한기석 현감에 의해서 서재가 크게 수리되었고 고종 22년(1885)에 다시 동재가 중수되었다. 향교에 보관되어 있는 중수기에 의하면 이후 임실향교는 고종 31년(1894), 광무 11년(1887), 1916년, 1919년, 1928년, 1935년, 1941년 등 수차에 걸쳐 다시 중수되었다. 근래에 이르러서 1988년 대성전을 보수하고, 명륜당 마루공사, 번와 등을 실시하였고, 1986년 서재와 명륜당을 보수하였다.   대성전, 명륜당 등 다양한 건물이 있는 임실향교의 구조 현재 향교에는 맨 뒤로부터 정면 3칸(11.20m), 측면 4칸(7.2m)의 맞배지붕의 대성전(24.5평)과 정면 3탄(6.70m), 측면 1칸(2.40m)의 고루집 형식의 내삼문(4.,9평)이 있고, 그 앞에 정면 3칸(11.40m), 측면 3칸(5.90m)이 맞배지붕 형식의 명륜당(20.4평)이 있다. 명륜당을 사이에 두고 그 앞으로 정면 4칸(10.0m), 측면 1칸(6.20m)과 맞배지붕형식의 동재(10.8평), 정면 5칸 (14.8m), 측면 2칸 (6.0m)의 맞배지붕의 서재(25.4평)가 마주보고 배치되어 있으며, 이 앞에 정면 3칸(6.2m), 측면 1칸(2.60m)의 맞배지붕의 형식인 외삼문(4.9평)이 있다. 그리고 명륜당과 좌측의 협문을 사이에 두고 맞배지붕 형식의 관리인 집(25평)이 있다. 한편 외삼문 밖에는 근래에 만든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그 왼편에는 문묘중수사적비, 임실향교주수사적비, 임실향교 모성계사적비 등 3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명륜당 옆에는 둘레 4m, 수고25m, 수령 700년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이 은행나무는 1982년 9월 20일 도나무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죽림암

오랜 역사의 모습을 담고 있는 천년 사찰, 죽림암 임실읍의 안산이라고 할 수 있는 용요산의 중턱에 있는 사찰로 구임실경찰서에서부터 서쪽으로 약 1.5km 정도 떨어져 있다. 9세기 말경 신라의 진감선사가 암자를 짓고 수도하였던 곳이라고 전하는데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죽림암의 법당의 연혁기에 의하면 조선 연산군 18년(1584)에 태고 진우국사의 4세손인 벽필 지암 대선사가 초건 하였고 현종 5년(1664)진묵 일옥 대선사가 중창하였고 그 이후 수차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래 법당 본전 5칸과 칠성각 산신각 등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규모가 줄었고, 6.25 동란 때 다시불타 버렸다. 현존하는 법당, 칠성각, 산신각 등은 1981년 중수된 것이다. 법당 본전은 정면 5칸(5.80M), 측면 2칸(2.30m) 8각 지붕의 건물이고, 미륵당(2.20∼1.90) 산신각(1.75∼1.85), 칠성각(3.10×2.46)은 각각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정면 2칸 측면 1칸의 6평 규모의 목조 슬레이트 구조의 헛간이 있다. 암자의 바로 앞에는 오래된 느티나무 3그루가 서 있는데 큰 것은 두레가 6.5m, 높이가 약 25m정도로 이 절의 역사를 짐작케 한다. 교파는 조계종이다. 신흥사와 더불어 창건된 죽림암의 역사 역사 절의 창건은 통일신라시대에 진감(眞鑑) 국사 혜소(慧昭, 774~850) 스님이 임실군 관촌면에 있는 신흥사와 더불어 창건했다고 전한다. 신흥사는 포교를 위한 도량으로, 죽림암은 수행을 위한 도량으로 청건한 것이라고 한다. 창건 후 고려시대의 연혁은 전하는 것이 없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1504년(연산군 10)에 벽송 지엄(碧松智嚴, 1464~1534) 스님이 중창했다. 그런데 법당에 걸려 있는 '죽림암 연혁' 현판에 보면 절은 이 때 벽송 지엄 스님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창건 연대가 다른 거승 1504년 지엄 스님의 중창을 실질적 창건으로 보아서 그렇게 기록했는지 모르겠다. 그 뒤 절은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렸으나 1604년(선조 37)에 진묵 일옥(1562~1633) 스님이 중창했고, 1868년(고종 5)에 허주 덕진 스님이 다시 중창했다고 한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1908년 이후로 권법상(權法相) · 정법민(鄭法敏) · 오일탁(吳一鐸) · 박금규(朴金奎) · 신동호(申東浩) · 최흥춘(崔興春) · 성암 길남(惺庵吉男) 스님 등이 주지로 있었음이 '죽림암 현판'에 나와 있다. 근래에 들어와서는 1981년에 성암 길남 스님이 법당 칠성각 산신각 수각 등을 중수했고, 그 뒤 1984년부터 재정(在淨) 스님에 의해 칠성각 · 산신각 · 요사 등이 중건되었다. 절 이름이 죽림암인 것은 옛날 절 주위에 왕대가 많아서였는데, 왕대가 칡덩쿨로 인해 자라지 못하자 스님이 대를 보호하고 칡덩쿨을 없애기 위해 불을 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작은 대나무만 남았을 뿐이라고 전한다.

오수의견공원

오수의견비가 있고, 의견문화제가 개최되는 시민들의 안식처 최근 반려동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개와 고양이와 같은 애완동물을 애완이 아닌 반려 동물로 바꿔 부르고 있는 것이다. 반려동물은 인간을 잘 따르고, 인간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한다. 이러한 반려동물의 역사는 어제오늘일이 아니다. 먼 신라시대에도 그러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바로 오수면의 오수의견이야기이다.   임실에서 남원으로 가는 춘향로로 10km쯤 가면 오수면이 나온다. 오수라는 지명은 이 고장에 구전되어온 전설과 관련되어 '보은의 개'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오수 시장 옆에 있는 원동산 공원에는 의견비와 동상을 세워, 주인에 대한 개의 충성과 의리를 기리고 있다. 최근에는 오수에서 임실쪽 1.2km지점 4차선 도로변 오암리에 새로운 의견상을 세워 작은 공원으로 조성하여 휴식공간으로도 이용하고 있다.   주인을 살린 충견의 전설이 살아있는 곳   신라 때 지사면 영천리에 김개인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개를 몹시 사랑한 그는 출타할 때마다 데리고 다녔다. 어느 날 주인이 장에 다녀오면서 술에 만취되어 귀가길에 곯아떨어져 잠이 들었다. 때마침 산불이나 번지던 불길이 주인근처로 오자, 다급해진 개는 주인을 깨우려고 온갖 방법을 다 했으나 소용이 없자, 물 속에 뛰어 들어가 온몸에 물을 묻혀 주인 주변을 적시는 일을 수백번 반복하여, 불길을 겨우 막았다.   그리고 나서 개는 지쳐서 쓰러져 죽고 말았다. 잠에서 깨어난 주인은 모든 상황을 짐작하고 개의 의리에 감탄한 나머지 개를 묻어주고, 무덤에 지팡이를 꽂아 놓았다. 그런데 그 후 싹이 나서 큰 나무로 자랐다. 의리있는 '개나무' 고장이란 뜻으로 그 이후 오수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오수면에서는 지역사회 개발과 지역민의 일체감을 조성하고 희생과 충성이 담긴 의견의 넋을 위로하고 의로운 정신을 길이 보존 시키며, 명견명소로 인정을 받고 지역을 널리 알리고자 매년 4월에 다채로운 의견문화제 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해월암 신포정

해월암에 위치하여 상춘객에게 인기가 많은 정자 해월암 신포정은 해월암에 위치하고 있는 정자이다. 주변에 나무가 우겨져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봄과 여름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정자의 모습을 보면 마치 우화를 보는듯한 느낌을 전해준다. 토끼와 호랑이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 인상적이며, 학과 용 등을 구성된 조형도 아기자기한 느낌을 자아낸다. 해월암은 고려말 1352경 오수면에 해경대사와 월산대사가 창건하였다 하여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해월암이라 이름하였다. 본전은 ㄱ자형의 팔각 우진각건물이고 산신각은 정면 측면 각각 1칸의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1556년(명종 11년)7월 20일 남원부사가 중건했고 1747년(영조 23년) 5월 15일에는 거사 양정봉이 중수하고 다시 1858년(철종 9년)과 1915년에 중수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월암에 숨어 있는 두 가지의 창건 이야기 해월암은 고려말 1352경 오수면에 해경대사와 월산대사가 창건하였다 하여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해월암이라 이름하였다고 전한다. 이것이 해월암의 첫 번째 창건설화이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조선시대 초 1396년(태조 5)에 무학 자초 스님이 창건했다고도 한다. 조선시대인 1556년(명종 11)에 남원부사가 중건했고, 1747년(영조 23)에 양정봉이 중수했다. 이어서 1858년(철종 9)에도 한 차례 중건이 있었고, 1915년에는 봉인(奉仁) 스님이 불상을 봉안하며 절을 중건했다. 근래에는 1990년에 주지 정현 스님이 대웅전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절 일원이 전북특별자치도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