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대의 호남에는 3개의 성당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을 천주교로 귀의시켰다. 되재(升峙완주군 화산면), 나바위(羅岩:익산군 망성면 화산리), 수류(김제시 金山面 禾栗里) 본당이 바로 그것이다. 노령산맥의 주봉인 모악산과 상두산 국사봉에 둘러싸인 수류본당은 라끄루신부가 확보한 대지위에 2대 페네 신부가 48간의 성당을 1907년에 건축하였다.
시골에서는 처음보는 웅대한 한국 전통의 건축양식이었다. 1908년에는 仁明學校를 세워 전북특별자치도 최초의 신식학교로서 한문과 신학문을 가르쳤다. 수류본당의 관할은 김제, 부안, 정읍, 순창, 고창, 담양, 장성까지였다. 3대 투르테신부이후 뤼카, 이상화, 최민순, 석종관 신부를 거쳐 최재선 신부 때에는 원평에 공소를 세웠다. 10대 이약슬 신부 때 해방을 맞았고 김후성 신부 때 6·25를 맞아 유서깊은 구성당이 소실되고 말았다. 이때에 수류는 피난처로 소문이 나서 신부와 수도자들이 50여명이와서 은신하고 있었다. 공산당들은 이들을 잡기 위하여 수류성당의 신도 50여명을 붙잡아서 신부와 수도자들의 은신처를 물었다. 그러나 신도들은 결사의 각오로 성직자들의 숨어있는 곳을 토설하지 않았다. 결국 공산당들은 유서깊은 수류성당을 불질러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50여명의 신도들은 공산당에 의해 학살 당했다. 성당이 소실된 까닭에 6.25 이후 10년간인 1960년까지 수류지역의 신자는 김제본당에 소속되었다.
1959년에는 현대식 성당을 재건하여 전주교구 관하의 수류본당을 재건하고 부흥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류는 한국뿐아니라 동양권에서 가장 많은 신부를 배출한 지역으로 이름이 나 있다. 11명의 신부(김영구, 정재석, 서정수, 김반석, 김영일, 범석규, 박영규, 안복진, 박문규 등)와 11명의 수도자를 배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