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위치하는 미륵사지는 백제 최대의 사찰로 30대 무왕(600~641년)에 의해 창건되었고, 17세기경에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륵사지가 발굴되기 이전에는 백제 창건당시에 세워진 미륵사지 서탑(국보 11호) 1기, 그리고 석탑의 북쪽과 동북쪽 건물들의 주춧돌과 통일신라시대에 사찰의 정면 양쪽에 세워진 당간지주 1쌍(보물 236호)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미륵사지에 대한 조사연구는 일본인들이 1910년 고적조사를 개시로 남아있는 석탑과 관련, 부분적인 조사를 실시하여 ‘品’자형 가람배치를 갖는 것으로 주장되기도 하였다.
그 후 1974년과 1975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는 동쪽에 남아있는 탑 자리가 목조탑인지 석조탑인지 밝히기 위하여 동탑지 부근을 발굴 조사하여 서탑과 같은 규모의 석탑지임을 확인하였다. 1980년에 들어서 문화재 연구소에서는 백제 문화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당시 최대 규모의 사찰인 미륵사지를 정비하고 보호하여 이를 사회교육도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종합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종합적인 발굴조사 결과 일본인들이 주장한 ‘品’자형의 가람배치는 맞지 않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확인된 가람배치에 의하면 동탑과 서탑이 있고, 그 중간에 목탑이 있으며, 각 탑의 북편에 금당(金堂=법당)의 성격을 지닌 건물이 하나씩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이들 탑과 금당을 한 단위로 구분하는 회랑이 있어 동쪽은 동원(東院), 서쪽은 서원(西院), 중앙은 중원(中院)이라는 개념의 삼원 병립식 가람형태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중원의 북측에 거대한 강당(講堂) 하나만을 두고 공동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여기에서 ‘가람’이란 승가라마(僧伽藍摩)의 준말로 범어(梵語)의 Sngharama에서 유래 된 것으로 여러 승려들이 한군데 모여 살면서 불도를 닦는 것을 뜻하였으나, 후세에 와서는 절에 속한 집을 말하는 것으로 의미가 축소되었다.
아무튼 이러한 가람배치는 동양가람배치연구에서는 밝혀진 바가 없는 전혀 새로운 형식의 특수한 형태이다.
이용시간 | 10:00~18: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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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시설 | 일반 141대, 버스 13대, 장애인 5대 |
쉬는날 | 1월1일, 설날·추석 당일,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개관하고 다음 평일에 휴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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