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건에 대해서는 529년(백제 성왕 7)에 진감(眞鑑)국사 혜소(慧昭, 774~850)스님이 창건했다는 기록이 '운수지(雲水誌)'에 보인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혜소국사는 8~9세기에 활동했던 스님이므로 529년에 혜소스님이 창건했다는 말은 서로 맞지가 않는다. 연대가 잘못되었는지 혹은 또 다른 혜소국가가 있었는지는 지금 확실히 말할 수 없는데, 이 가운데 혜소 스님의 창건건설에는 스님이 임실읍 성가리에 있는 죽림암과 더불어 수행과 포교를 위해 두 절을 각각 지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죽림암?편 참고). 창건 뒤 여러 차례의 중건과 중수가 있었다고 하는데, 창건 당시 사세가 한창일 때는 대웅전을 비롯해서 중건과 중수가 있었다고 하는데, 창건 당시 사세가 한 창일 때는 대웅전을 비롯해서 나한전 산신각 명부전 응진각 칠성각 선방 금강문 요사 등 400여 평의 건물에 300여 명의 스님이 머물렀던 대찰이라고 한다. 그 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영허(靈虛, 1816~1874)스님과 월영(月影) 스님이 중창했다고 전한다. 일제강점기 때는 운흥사로도 불렀는데, 이후 절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매우 퇴락했다.
여러 차례 중건했지만 대웅전등 주요건물은 창건당시 백제 때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 매우 소중한 가치가 있다. 또한 창건당시 대웅전, 나한전, 산신각 정문, 요사가 김제의 금산사 못지않았다고 한다. 대웅전의 기단은 자연석이며 초석도 역시 자연석 주초이다. 기둥은 배흘림이 뚜렷하고 특히 우주는 다른 기둥에 비해 매우 강하다. 전체적으로 보아 기둥의 높이가 평면 규모에 낮음으로 해서 지붕이 상대적으로 크게 보인다. 정면의 문은 어칸이 4분합의 빗살문이며 협칸은 각각 3분합의 빗살문으로 되어 있다. 처마는 겹처마다 둘렀으며 그 아래 공포는 다포식으로 내외 2출목이며 어칸에는 공간포가 2개, 협칸에는 1개씩 있고 저공의 끝은 앙설로 조각적 수법은 그리 화려하지 못하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을 단청으로 보완하여 단순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창방머리는 보아지형식의 곡선, 장식을 했고, 단청 역시 초화문으로 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아 측면의 폭의 넓은 편이며 그 중 어칸이 특히 넓어 내진의 공간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또, 측면풍판의 마무리가 부드러운 곡선으로 되어있는 점이나 측변의 너새도 정면과 같이 새들로 단정히 정리한 것으로 보아 측면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듯하다.
이용시간 | 주차시설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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