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사는 백제법왕 원년(599)에 창건되었다.
통일신라의 의적화상은 당나라 현장문하에서 유학하고 금산사에 돌아와 25부 70여권의 방대한 유식사상의 저술을 남겼다. 숭제법사와 진표율사를 거쳐 고려 혜덕왕사로 이어지면서 유식학 법상종의 종주로 자리매김하였다.
정유재란 후, 1635년 수문대사가 금산사를 중건하면서 미륵과 화엄의 2원 체계로 도량을 정비하였다. 조선영조 원년 환성 지안대사는 전국에서 모여든 1,400여 스님이 운집한 가운데 화엄산림을 개최하였다. 근래들어 월주스님에 의해 미륵바로알기운동을 펼치고 있으며, 대사회 활동을 통해 자비와 보살행을 몸소 실천하는 사찰임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금산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되어 1400여 년의 역사를 이어 오늘날까지 법등을 밝혀온 유서 깊은 명찰이다. 금산사 일원은 사적 제49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호남평야 가운데 우뚝 솟은 모악산 서쪽 자락에 위치해 있다. 정유재란 때 왜군의 방화로 모든 건물과 산내의 40여 개 암자가 완전히 소실되는 등 수난을 겪었으나 이후 많은 문화재가 조성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1년(599년)에 나라의 복을 비는 자복사資福寺로 창건된 것으로 전한다. 진표율사眞表律師가 금산사의 숭제법사崇濟法師에게 출가했다는 기록과 통일신라 초에 활동한 의적義寂(681-?) 스님이 당나라 현장스님에게 유학하고 돌아와 금산사에 머물며 25부 70여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는 기록들을 통해 당시 금산사가 창건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금산사가 대사찰의 면모를 갖춘 것은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가 주석하며 시작되었다. 진표율사는 미륵전을 짓고 미륵장륙상을 조성하였으며 해마다 단壇을 열어 법시法施를 널리 베풀었다.
후삼국시대에 금산사는 다시금 역사서에 등장한다. 후백제의 군주 견훤이 아들 신검 등에 의해 금산사에 감금되었다가 탈출하여 왕건에게 투항하였다는 내용이다. 금산사에는 ‘견훤성문’으로 불리는 개화문과 석성 등 견훤과 관련된 유적이 전하고 있다.
중관 해안中觀海眼이 쓴 『금산사사적』(1635) 에는 “백제 법왕 1년(599)에 법왕이 즉위하여 살생을 금지하는 법을 발표하고, 이듬해(600)에 금산(사)에 38명의 승려를 득도시켰으며, 또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진표율사가 금산사의 숭제법사에게 출가했다는 기록이나 통일신라시대 활동한 의적스님이 금산사에 주석했다는 기록을 보면 금산사가 백제시대에 창건되었음은 확실하다.
진표율사는 신라 경덕왕 대에 활동한 스님으로 사실상 금산사의 창건주라고 할 수 있다. 진표율사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진표전간眞表傳簡」과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嶽鉢淵藪石記」, 『속고승전續高僧傳』 등에 비교적 상세하게 남아 있다.
법상종法相宗은 유식사상唯識思想과 미륵신앙을 기반으로 성립된 종파로, 고려시대 11세기 초 목종과 현종 이후 왕실과 관련을 맺으면서 크게 융성하였다. 이 시기에 법상종의 대표적인 사찰인 금산사 또한 중흥하였다. 혜덕왕사 소현慧德王師 韶顯(1038-1096)이 금산사의 주지로 취임하면서 금산사는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혜덕왕사가 금산사에 주석하는 동안 남아 있는 법당을 모두 보수·중축하는 것은 물론 새롭게 중창하였다. 현존하는 석조물인 방등계단, 석련대, 노주 등이 이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산사의 사역이 대사구大寺區, 봉천원구奉天院區, 광교원구廣敎院區의 세 구역으로 나뉘게 된 것도 모두 혜덕왕사의 중창에서 비롯된다.
조선시대 금산사는 1492년 세조의 서자 덕원군 이서李曙가 금산사를 불사한 기록이 있어 당시 왕실과 연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조 25년(1592)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7년에 걸쳐 조선의 국토를 황폐화시켰다. 호남지역 또한 의승군이 집결하였는데, 그 중심 사찰이 금산사였다. 호남의 의승군을 이끈 뇌묵 처영雷黙處英은 금산사에서 출가하였고 후에 묘향산으로 가서 서산대사에게 선종의 종지宗旨를 전수받았다. 뇌묵 처영대사는 사명대사 유정과 함께 서산대사의 2대 제자로 일컬어진다. 총섭의 지위를 받고, 후에는 ‘국일도대선사부종수교보광현랑뇌묵國一都大禪師扶宗樹敎葆光玄朗雷黙’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이 시기 조정에서 전국의 사찰 가운데 선교16종 규정소를 설치하였는데, 금산사는 전라우도 규정소로 지정되어 도내의 여러 사찰을 관할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전라좌도와 전라우도를 관할하는 규정소로 확대되었다.
인조 13년(1635)에 이르러서야 금산사는 낙성을 보게 되었는데, 오늘날 우리가 보는 금산사 가람은 이때 복원된 것이 대부분이다. 사찰 중건과 함께 당시 주지였던 지훈 스님과 간고 천택스님, 용면 응지스님 등이 주선하여 중관 해안스님으로 하여금 1635년 11월 『금산사사적』을 편찬하게 하였다. 현재 필사본으로 전하고 있는 『금산사사적』은 재건 공사와 함께 자료를 수집하여 작성한 것이다. 또한 조선 후기 금산사에는 호남불교의 중심 사찰이라는 위상에 걸맞는 스님들이 주석하였다. 대표적인 스님으로 백곡 처능 선사, 남악 태우 대사, 환성 지안대사 등을 들 수 있다.
1935년 3월 큰 화재로 미륵전 본존불이 전소되었다. 당시 공모전이라는 파격적인 방식(불모 일섭스님 등 당대 유명 작가 5인 응모)으로 진행되었는데 일본 동경대에서 수학하고 갓 돌아온 김복진씨가 당선되어 복원불사가 시행되었다. 김복진은 서양조각을 공부한 근대 조각가이다. 그는 새로운 재료인 석고를 이용하면서도 전통을 계승한 미륵대불을 완성하였다. 1961년에 금산사의 주지로 부임한 태공 월주 스님은 미륵전을 비롯하여 많은 불사를 이루었고 여러 스님들의 노력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62년 조계종 통합종단이 만들어지면서 17교구의 본사로서 조계종의 종헌과 종지종풍을 따르고 있다.
주차시설 | 승용차:200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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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안내 | 금산사 홈페이지 참조 https://www.geumsansa.org/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