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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말주선생의 십로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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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정보
전북특별자치도 순창군 순창읍 남산길 32-3
문의전화
일반전화 : 063-653-2238
여행후기
☆☆☆☆☆ (0)건

문화재설명

자(字)는 자즙(子楫), 호(號)는 귀래정(歸來亭)이라한 그는 단종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로에 나갔으나 세조가 단종을 폐위함을 옳게 여기지 못하고 벼슬을 버리고 처(薛氏婦人-本貫 玉 川)의 고향인 순창에 내려와 정착하여 그 후로 신씨(申氏) 집성촌을 남산대에 이루었으며, 설씨부인은 순창읍 가남리 사직(司直) 설백민(薛伯民)의 딸로 권선문첩(勸善文帖)을 지었다. 그후 다시 그는 세조 5년(1459)에 벼슬길에 나아가 요직을 거치며 승진을 거듭하다가 성종 7년(1476)에는 전주부윤(全州府尹)을 지냈으며, 진주목사, 창원도호부사를 역임했다. 그후 1487년에는 다시 대사간이 되었으며, 다음해에는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전라도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노년에 이르러 순창에 돌아와 생활하면서 70이 넘어 지기상합한 노인 10명과 계회(契會)를 맺어 십노계(十老契)라 이름하고 계의 연유와 목적, 성격, 행동들을 적은 서문을 쓰고, 여기 에 10인 노인들의 인물도를 그리고 경구시를 첨주한 것인데 이는 그들의 사상 당시의 사회 풍습의 내용까지 엿볼 수 있다. 서문과 도형을 쓴 계첩 열 벌을 만들어 각각 그 후손들에게 나누어주었으나 다른 곳의 것은 찾을 수 없고 원작 첩질인 신말주 선생의 것만 현재 후손인 신길수씨가 보관하고 있다. 한편 남원의 십노사에 소장된 장씨(張氏)의 것이 있었다한는데 8.15해방 후에 도난당했다고 한다. 신말주(申末舟) 선생은 조선 세종 11년(1429)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세종때부터 단종, 세조, 예종, 성종대의 학자요 정치인인 신숙주(申叔舟)의 동생이기도 하다.




귀래정공 신말주선생 십노계첩 번역 및 해설

내 나이 늙어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 이듬해 어느 봄날, 같은 고을에 사는 전 부장 이윤철이 술병을 들고 나를 찾아 왔다. 그래서 우리 두사람은 귀래정위에 앉아 서로 한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때 나는 옛사람들이 고향이 서로 같다는 사실을 중하게 여긴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우주의 역사 속에서 서로가 같은 한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은 그 사실만으로도 다행이 아닐 수 없을 것이오. 그러나 이 우주에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각각 멀리 떨어진 곳이 많아 비록 같은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서로 만난다는 것을 기약하기란 참으로 어렵소, 그런데 서로 고향이 같다는 것은 같은 시대에 태어난 데다 또 태어난 나라가 같고 거기에 또 태어난 고을이 같다는 것이니 이보다 더 큰 다행이 어디에 있겠오. 옛사람들이 고향을 중히 여긴 이유가 이런데 있소. 옛사람들은 우주내의 모든 사람은 다 형제라 말하였는데, 항차 그 우주 속에서도 또 같은 나라 같은 고을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서로의 정분이 어떠하겠오. 더구나 우리는 이제 모두 70세가 넘어 앞으로 살 날이 많지도 않은 처지입니다. 그러니 좋은 날을 택하여 우리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 즐거운 하루를 보내는 일을 서둘러 강구하여야 하지 않겠오. 이렇게 말하자 이공(李公)은 자리에서 일어나 절하며 말하기를

- 말씀을 듣고보니 참으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 고을에 70이 넘은 사람이 어찌 우리 두사람 뿐이겠습니까. 다만 그들이 과연 우리와 뜻을 같이 할지 아직은 모르니 먼저 그들에게 우리의 뜻을 알려 동참을 원하는 사람을 모아야겠습니다. 하였다.

이런일이 있은지 얼마 후에 들으니 우리 고을에 70이 넘은 노인으로는 동에 김박과 한승유, 남에는 안정, 오유경, 설산옥, 설존의, 장조평 그리고 서에는 조윤옥등이 있어 이들 모두가 우리와 뜻을 같이 한다고 하였다. 결국 우리 두사람까지 합하여 모두 열사람이 된 것이다. 그래서 서로 의논하여 생년월일 순으로 서열을 매기고 나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여 돌아가면서 모임을 주관하고 한 바퀴가 끝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그리고 이 모임은 백거이(白居易. 771~846, 자는 樂天, 당나라때의 시인)가 그의 만년에 자신의 거처인 낙양의 향산(香山-향산은 백거이의 호이기도 하다.)에서 구로(九老)의 모임을 갖고 술과 노래로써 즐기던 그 전통과, 문언박(文彦博,1006~1097,송나라때의 유명한 학자이며 정치가)이 역시 만년에 백거이의 구로회를 본따 이미 노경에 이른 당대의 학자, 정치가 부필(富弼)사마광(司馬光)등 10여인과 함께 낙양 기영회(洛陽耆英會)의 모임을 갖고 여생을 즐기던 그 전통을 이어 받기로 하였다. 그러하니 이는 참으로 뜻있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서로 만나서 술자리를 벌일 때에는 그 예절을 되도록 간략하게 하고 술을 주고 받음에 있어서도 주인이라고 권하기만 할 것이 아니고 또 객이라고 해서 사양하기만 할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 앞에 놓인 술과 과일을 들어가며 술 한잔에 시 한수씩을 읊어 즐거움을 나누기로 하였다. 이러한 자리는 꼭 술과 음식이 상에 가득하도록 차려지고 술과 술상이 낭자한 지경에 이르도록 먹고 마셔야만 된다는 이치는 있을 수 없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경비의 낭비가 될뿐만 아니라 결국은 넘어지고 토하고 하여 예를 더럽히는 결과가 된다. 더구나 우리들의 경우에는 그것이 노기(老氣)를 손상시킬 것이니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그러니 우리들은 마땅히 옛 사람들이 지켰던 그 예절을 따라 모든 것을 간략하게 하여 반찬은 한두 그릇을 넘지 않게 하고 술도 있는 그대로 쓰기로 한다. 이렇게 하면 준비도 쉽고 해서 누구나 다 그 차례를 감당할 수가 있고, 따라서 자주 모임을 갖어도 병폐가 될 것이 없으니 이는 옛 성현들이 사치로운 것 보다는 검소한 것이 오히려 낫다는 말씀에도 어긋나지 않는 일이다.

다만, 이상과 같은 내용을 말로만 약속을 하면 오래 가지 못할 염려가 있으므로 우리의 모임을 그림에 담고 거기에 또 각자의 시 한수씩을 적어 넣기로 한다. 그렇게 하면 한편으로는 우리의 기쁘고 즐거운 뜻을 담는 일도 되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경계가 되기도 할 것이니 이를 각각 한 벌씩 나누어 가져 앞으로 이 모임이 우리가 모두 죽는 그날까지 길이 지속되록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후일 우리의 자손들이 이를(십로도) 보고 조상들의 두터웠던 뜻을 알아 다시 이 모임을 계승할 수도 있을 것이니 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홍치 기미년(弘治 己未年, 즉 1499년) 봄.신말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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