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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계신도비 및 남원윤씨 절행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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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정보
(54505)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성당면 상중와길 74-88
문의전화
일반전화 : 063-861-0204
여행후기
☆☆☆☆☆ (0)건
<h3 class=article_tit>
전북특별자치도문화재자료 제135호 유계신도비 및 남원윤씨절행정판</h3>
<p class=article_cont>
유계신도비는 성당면 와초리 상와부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종 9년(1668년)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글을 지었는데, 서거 후 94년만인 영조 33년(1757년)에 건립되었다. 좌대는 높이 39㎝, 두께 120㎝, 폭 166㎝이며, 비신은 높이 231.5㎝, 두께 45㎝, 폭 85㎝이며, 관석은 높이 50㎝, 두께 90㎝, 폭 120㎝이다.</p>
<h3 class=article_tit>
유계 선생의 공적을 담고 있는 신도비와 남원윤씨절행정판</h3>
<p class=article_cont>
유계(1607&sim1664)는 김장생의 제자로 그에게서 성리학을 배웠으며, 예학과 사학에도 능하여 송시열·송준길 등과 함께 충청 유림의 5현(賢) 중 한 분이다. 인조 11년(1633)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관리로 벼슬을 시작하였으며,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는 청을 배척하자는 척화론을 주장하였다가 양국이 화해를 하는 바람에 유배를 당하였다.<br />
인조 17년(1639) 유배에서 풀려나 관직을 버리고 금산에 머무르며 학문에 전념하였고, 인조 24년(1646) 무안현감이 되었다. 효종 10년(1659)에는 시강원의 문학으로 등용되었으며, 그 후 여러 관직을 두루 맡아보게 되었다. 효종이 죽고 복상문제가 일어나자 윤선도 등이 주장하는 3년설을 반대하며 왕에게 글을 올리어 그들을 유배시키거나 낮은 벼슬로 좌천시키기도 하였다. 이후 이조참판에까지 올랐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저서로는 『시남집(市南集)』,『여사제강(麗史提綱)』,『가례원류(家禮源流)』등이 있다.<br />
비각 안에 있는 유계신도비는 낮은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모습이다. 비문은 현종 9년(1688) 우암 송시열이 지은 것으로, 90년이 지난 영조 33년(1757)에 비문을 새겨 비를 세웠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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