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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여행!

‘온통 비단같다'하여 ‘전라(全羅)’라 했다. 무엇을 해도 즐겁고 새롭구나!
오랜 시간의 흔적 속에 콕콕 박혀 있는 삶의 녹녹한 체취를 찾아 항해하다보면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해지는 행복한 여행을 떠날 수 있을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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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으로 떠나는 스토리텔링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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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관리자 등록일 2019-01-04 조회수 6760
여행 개요 깊은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지닌 군산으로 떠나는 여행
첨부파일 동상--신시배수갑문.jpg (547 kb)

 겨울방학 군산여행, 군산 스토리 여행




1. 신화와 전설이 점점이 펼쳐지는 절경, 선유팔경

 부랴부랴 군산연안여객터미널에 도착했다. 늦은 줄 알고 서둘렀지만 선유도행 배편을 끊고 보니 오히려 시간이 여유가 있어서 늦은 아침을 간단히 해결했다.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에 있는 섬에 가려면 이곳을 거쳐야 한다.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는 군산시에서 남서쪽에 있는 10여 개의 유인도와 20여 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진 군도를 말한다. 사람이 사는 섬으로는 큰 섬으로 무녀도(巫女島), 선유도(仙遊島), 신시도(新侍島), 방축도(防築島) 등이 있다. 고려 때부터 수군 진영을 두고 군산진이라 불렀는데, 조선 세종 때 진영을 진포라 불리던 육지로 옮기면서 지명까지 가져가고 이 섬들에는 옛날의 군산이란 뜻으로 고군산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군산 지명의 원조는 고군산에 있는 셈이다. 

군산 여안여객터미널
군산 여안여객터미널


 고군산군도에는 재미있는 유래가 있다. 부안의 장신포라는 어촌에 곽씨(郭氏) 노인이 과부 며느리와 손자 하나를 데리고 살고 있었다. 가난하지만 단란하게 살고 있던 어느 날, 도사 하나가 찾아와서 이상한 말을 했다. 뒷산에 있는 장군석의 코에서 피가 흐르는 날이면 이 인근이 온통 바다가 될 것이니 높은 곳으로 피하라는 것. 이후 곽씨 노인은 날이면 날마다 손자를 등에 업고 뒷산에 올라 장군석의 코만 바라보는 것이었다. 이 꼴을 본 며느리가 어이가 없어서 장난을 좀 치기로 했다. 노인이 없는 틈을 타서 장군석의 코에 빨간 칠을 한 것이다. 이것을 본 노인은 드디어 그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피난 갈 준비를 하였다. 며느리가 피난할 생각을 안 하는 건 당연했다. 며느리를 설득하다 못해 노인은 결국 손자만 데리고 그곳을 떠났다. 그런데 노인이 떠나자 거짓말처럼 해일이 몰려와 그 마을과 함께 인근 세 개의 마을을 집어삼켰다. 마을은 순식간에 망망대해로 바뀌고 높은 산봉우리만 듬성듬성 남았는데, 그 봉우리들이 바로 고군산군도라는 것이다.

선유도 절제사비군
선유도 절제사비군

 
 일종의 곽씨 시조설화인 것 같은데, 약간은 성적인 함의가 있는 설화인 것 같다. 홀아비와 과부 며느리가 등장한다는 것도 그렇고 하필이면 코에 붉은 칠을 한다는 것도 그렇다. 이중에서도 선유도(仙遊島)는 고군산군도의 맏형뻘 되는 섬인데, 고려시대에는 여·송 무역항로의 기항지였을 뿐만 아니라 최무선이 왜구와 전투에서 승리한 진포해전의 기지였고, 임진왜란 때는 함선의 정박기지로 쓰였다. 해상요지였던 것이다.
 어느덧 쾌속선은 군산시내를 저 멀리 던져두고 바다 한 가운데로 나왔다. 갈매기들은 관광객이 던져줄지도 모르는 먹이를 바라는지 배 근처를 회유하며 따라온다. 
 40분이 지나자 선유도의 ‘망주봉(望主峰)’이 보인다. 신선이 노닐던 땅이라서 선유도이고, 망주봉의 형세가 신선이 마주보고 바둑을 두는 모양이라서 선유도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막상 망주봉의 유래는 노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선유도에 유배된 한 선비가 이곳 바위산인 망주봉에 올라서 한양 쪽을 바라보며 임금을 그리워했다고 해서 망주봉이다. 망부석과 비슷한 의미인 셈이다.
 
선유도 망주봉
선유도 망주봉


선유도와 장자도를 이어주는 장자대교
선유도와 장자도를 이어주는 장자대교

 
 선유도는 무녀도와 선유도, 장자도, 대장도 등 4개의 섬이 연륙교로 이어져 있다. 때문에 걸어서 구경하는 것은 물론 자전거를 타면 운동도 되고 풍광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 선유도의 풍경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을 정도로 곳곳이 아름답다. 옛 사람들은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8경으로 분류하기를 즐겼는데, 선유도도 예외는 아니다.
 첫째가 그 유명한 ‘명사십리(明沙十里)’이다. 여객선터미널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민박집과 회집이 늘어져 있는 마을이 나온다. 거기서 좀 더 가면 선유 1, 2구와 선유3구를 연결하는 제방이 나오는데, 이 제방의 한쪽에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맑은 모래가 깔려 있는 해수욕장이 있다. 이곳이 명사십리이다. 해당화가 만발하고 아름드리 소나무가 지천이었던 예전에 달 밝은 밤에 명사십리를 보면 평생 그 모습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그 옛 모습을 다 볼 수는 없지만 지금도 명사십리의 모래 위를 걸으면 정말 신선놀음을 하는 것처럼 즐겁다.
 둘째로 명사십리 건너편에 있는 ‘평사낙안(平沙落雁)’이다. 선유도는 두 섬이 땅콩껍질 같은 형상으로 이어져 있고 그 사이에는 작은 모래섬이 하나 있다. 평사낙안은 그 모래섬의 한가운데에 있는 잔디밭과 팽나무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팽나무의 네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있어서 그 모양이 모래 위에 내려앉은 기러기 형상과 같다고 하여 평사낙안이라 불렸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팽나무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 위에서 내려다 본 평사낙안의 풍경은 왜 기러기 모습이라고 했는지 이해가 갈 정도로 멋있다. 오죽했으면 정조도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겠는가.
 
十里平沙鴈陣橫 십리 넓은 모래밭에 기러기 떼 가로지르며
一時飛下九秋聲 일시에 날아 내리니 구추의 소리 울리는구나.
更看隻影南來遠 다시 보니 외 그림자가 남쪽 멀리서 날아오니
知是傳書報子卿 편지로 자경의 소식을 알리는 것임을 알겠도다. (홍재전서 중에서)
 
명사십리 백사장
명사십리 백사장

 
 셋째로 ‘망주폭포(望主瀑布)’가 있다. 망주봉은 두 개의 산봉우리가 마주보고 서 있는데, 그 곳에서 귀양 온 선비가 한양의 임금을 그리워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멀리서 보면 마치 신선이 바둑을 두는 형세라서 선유도의 상징처럼 된 봉우리다. 해발 152m의 이 봉우리에 여름철 큰비가 내리면 높은 봉우리에서 7, 8개의 물줄기가 폭포처럼 쏟아져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망주폭포의 장관은 여름철 운 좋게 방문해야 볼 수 있는 절경이라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
 넷째로 ‘삼도귀범(三島歸帆)’이다. 선유도 앞에 있는 장구도 등 무인도 세 섬이 줄지어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지금은 어장이 거의 사라졌지만 이곳은 서해어장의 중심지였고, 태풍이 오면 어선이 피하는 주된 피항지였다.
어획량에 따라 울고 웃는 곳이었고, 무인도에 갈매기와 물오리 등 바닷새가 몰리는 것은 만선의 상징이었다. 때문에 섬 주민에게는 온갖 바닷새에 둘러쌓인 채, 만선을 이룬 어선이 돛을 휘날리며 돌아오는 모습처럼 아름다운 풍경은 없었을 것이다. 그 모습이 삼도귀범이다.
 다섯째로 ‘선유낙조(仙遊落照)’이다. 서해바다 어디인들 낙조가 아름답지 않은 곳이 있을까싶지만 선유도에서 보는 낙조는 역시 색다르다. 각기 저마다의 전설과 신화를 안고 점점이 떠있는 섬과 섬 사이로 해가 질 때, 선유도에서 바라보는 하늘과 서해바다는 온통 새빨간 노을로 적막강산이다. 이 풍경은 이루어 말로 표현 못할 정도로 황홀한 느낌을 줘서 관광객의 말문을 막히게 한다. 
 
삼도귀범의 절경
삼도귀범의 절경
 
 여섯째로 ‘장자어화(壯子漁火)’가 있다. 장자어화는 장자도(壯子島)에 조기를 잡기 위해 모여 있는 고깃배들의 불빛이 절경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힘이 센 장사가 나왔다 하여 장자도라는데, 예전에 조기가 많이 나올 때는 장자도 주변에 수십 수백 척의 어선이 밤에 불을 켜고 작업을 했다고 한다. 파도에 일렁이는 불빛과 함께 사방이 조기 우는 소리 천지였으리라. 이 절경은 지금은 보기 힘들다. 환경과 기후의 변화로 인해 고군산 앞바다에 형성되었던 조기어장이 사라진 지 오래다. 장자어화(壯子漁火)는 한때 이곳이 황금어장이었다는 것을 증언할 뿐이다. 장자어화의 영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자전거를 타고 장자대교를 넘어가던 관광객들이 푸른 바다의 풍취에 취해 잠시 멈춰 선다. 장자대교는 이름과는 달리 아담하고 작은 연륙교이다.
 일곱째, ‘무산십이봉(無山十二峯)’이다. 무산십이봉은 고군산군도의 방벽 역할을 하는 방축도와 말도 등 12개 섬의 산봉우리가 마치 투구를 쓴 병사들이 도열하여 있는 모습을 일컫는 것이다. 선유봉에 올라 이곳을 바라보면 하나의 방벽 또는 적을 막기 위해 배치된 무사들로 보인다는 것인데, 오랫동안 조선수군의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했던 고군산군도의 역사를 반영한 말이다. 

장자도 어항
장자도 어항
 
 마지막으로 ‘월영단풍(月影丹楓)’이 있다. 월영단풍은 신시도에 있는 해발 199m의 월영봉의 가을철 단풍을 말한다. 신시도(新侍島)는 고군산군도의 24개 섬 중 가장 면적이 넓은 섬으로서 신라 초기에 섬 주변의 풍성한 청어를 잡기 위하여 김해김씨가 처음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월영단풍은 신시도 앞바다를 늦가을에 지나면서 보면 월영봉의 단풍이 한국화 병풍을 보는 듯 아름다워 사람들의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선유도 주소 : 전북 군산시 옥도면 선유도리


 
2. 차마 보내지 못하는 마음, 선유도 초분
 
 망자의 영혼이 육신을 떠나면 저승길로 들어선다. 그 저승길이 열화지옥인지 천당인지 산 자들은 알 수 없다. 그저 정성을 다해서 마지막 갈 길을 닦아주고 노잣돈을 챙겨줄 뿐이다. 이렇게 망자의 마지막을 보내는 방법이 장례 풍습이다. 장례 풍습에는 삶과 죽음을 대하는 사상과 문화가 배어 있다. 때문에 생활환경과 문화에 따라서 독특한 장례문화가 형성된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공장에서 찍어내는 듯한 장례식장의 장례가 일반화되어 전통적 장례 풍습은 거의 사라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서해안과 남해안 도서지방에서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초분(草墳)이라는 장례 풍습이 보편화돼 있었다.
 초분은 시신을 바로 땅에 묻지 않은 채 돌이나 통나무 위에 관을 얹어놓고 육탈(肉脫)될 때까지 이엉과 용마름 등으로 덮은 초가 형태의 임시 무덤을 말한다. 초가집의 지붕이나 담을 만들기 위하여 짚이나 새 따위로 엮은 물건을 이엉이라 하고, 초가의 지붕마루에 덮는 ‘ㅅ’자형으로 엮은 이엉을 용마름이라고 하는데, 초분에는 대개 용마름과 3마름(1마름은 보통 3단의 짚이 들어감)의 이엉이 들어간다. 일단 초분에 안치한 시신이 2, 3년이 지나 육탈이 되면 다시 해체하여 시신의 뼈를 깨끗이 씻는 씻김을 한다. 그런 다음에 최종으로 땅에 묻는 본장을 하는 게 초분의 풍습이다. 때문에 초분을 2차장 또는 복장(複葬)이라고도 한다.
 
선유초분공원 초분 1
선유초분공원                                                              초분 1
 
 고군산군도의 섬들에도 이러한 초분의 풍습이 최근까지 남아있었다. 그렇다면 왜 섬사람들은 귀찮게 두 번에 걸쳐 장례를 치를까. 초분의 풍습은 부모를 공양하기 위한 바다 사람들의 효심과 토착신앙인 풍수지리설의 영향에서 나온 것이다.
 바다 사람들은 고기잡이를 하다보면 수일 또는 수십일 이상 집을 떠나 있게 된다. 고기잡이에 나가는 사람은 또한 성인남성이기 때문에 대체로 집안의 가장일 경우가 많다. 그런데 만약 가장이 고기잡이를 나간 사이에 어르신이 돌아가시게 되면 졸지에 상주도 없이 상을 치르게 된다.
 부모의 마지막 길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그것처럼 불효막심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초분의 풍습에는 고기잡이를 나간 상주가 부모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더라도 돌아온 뒤 부모의 얼굴이라도 볼 수 있도록 배려를 하고, 다시 정성을 다해 보내드리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초분을 하는 또 하나의 상황은 마땅한 장지를 확보하지 못했을 때이다. 마땅한 장지를 확보할 때까지 임시방편으로 만든 무덤이 초분이다.
 초분의 풍습에는 죽음을 완전하게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관념도 깔려 있다. 일반적으로 시신을 묻은 무덤에는 산 사람이 접근하거나 생활을 하는 게 금기시되어 있다. 그런데 초분에는 그런 금기가 없다. 초분을 몇 년간 유지하려면 산 사람이 사는 집처럼 이엉을 갈고 지붕도 손보고 해야 한다. 대부분의 초분은 산에 있는 밭 주변에 만들기 때문에 바닷바람이 불면 날려갈 수도 있고 풀 먹이던 소들이 뜯어 먹을 수도 있다. 마치 살아있는 분을 모시듯이 돌봐야 하는 것이다. 한 마을 사람은 ‘후손이 부지런하면 초분이 성할 것이고 안 그러면 망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무녀도는 섬사람들에게 ‘서들이’라고 한 또 하나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건 아닐까.
 여하튼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초분은 옆에서 잠이 들 수도 있고 밥을 먹을 수도 있는 공간이다. 초분의 풍습이 있는 마을에 전해지는 속담 중에는 ‘귀신이 생사람을 묘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면 못나오지만 초분은 나올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난리 통에는 초분이 좋은 은닉처로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죽은 이의 무덤이 산 사람의 목숨을 건지게 한 것이다. 초분을 일반적인 무덤처럼 생각하지 않은 초분의 풍습에는 부모님을 차마 저승으로 보내지 못해서 조금이라도 더 이승의 생활에 붙잡고 싶었던 바다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있다.
 가장 최근까지 이런 초분의 풍습이 선유도의 바로 옆에 있는 무녀도에는 남아 있었다. 무녀도는 초분지로 유명해서 1977년 이두용 감독이 제작한 ‘초분’이라는 영화의 촬영지로 쓰이기도 했다.
 
초분 2 초분 3
공원 2                                                             초분 3
 
 그러나 2000년대 초반에 마지막 초분을 매장한 이후에는 초분을 하는 가정은 없다고 한다. 다만 한 기의 초분이 무녀도에 보존되어 있어서 모습을 유지할 뿐이다. 아쉽지만 사람의 관념이 변하면 풍습도 변하는 게 이치이다. 그래서 선유도에서는 이러한 초분문화를 알리기 위해서 공원을 조성하였다. 그래도 초분이 어떤 것인지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선유도로 오면 된다.
 
무녀도 전경
무녀도 전경
 

선유도 초분 주소 : 전북 군산시 옥도면 선유도리
 

 
 
3. 기약 없는 기다림이 빚은 전설, 장자바위
 
 섬사람에겐 기다림이 천형이다. 주민의 대부분이 바다에 의지하여 살 수밖에 없었다. 바다는 주민에게 풍요와 생명을 주는 곳이지만 때때로 빈곤과 절망을 주는 곳이기도 하다. 배 한 척으로 먹을거리를 해결했고 배 한 척으로 자식들을 대학에 보냈다. 그러나 바다는 언제나 온화하고 자비로운 얼굴을 가진 건 아니다. 거센 풍랑으로 바다가 심술을 부리면서 지아비나 아들자식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다. 유독 고군산군도 섬들에 기다림과 관련된 전설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리라. 
 
고군산 군도 전경
고군산 군도 전경
 
 선유도의 망주봉에는 귀양 온 선비가 임금을 그리워하며 한양 쪽을 바라봤다는 전설 이외에도 다른 이야기가 전해온다. 망주봉은 천년도읍을 이룰 왕이 북쪽에서 선유도로 온다는『정감록』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이다. 조선시대의 비서인『정감록』에는 범씨가 고군산에 천년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다스린다는 예언 구절이 있다고 한다. 이 예언을 믿은 젊은 부부가 나란히 북쪽 방향을 바라보며 왕을 기다렸는데, 왕은 오지 않고 기다림에 지친 부부는 몸이 굳어져서 바위산이 되었다고 한다. 큰 봉우리는 남편 봉우리이고 작은 봉우리는 아내 봉우리이다.
 기다림과 관련된 전설은 또 있다. 선유도 옆에 있는 장자도에 전하는 전설이다. 장자도에는 ‘사자바위'라는 큰 바위돌이 하나 있는데, 이 바위는 서해를 바라보는 형태를 하고 있어 먼 바다에서 오는 동네 액운을 막아준다고 주민들은 믿고 있다. 일종의 서낭당 역할을 하는 바위인 것이다. 그래서 새끼줄이나 흰 천이 둘러져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이 바위를 일명 ‘장자할머니 바위’라고도 한다.  

장자할매바위
장자할매바위
 
 옛날 장자도에 선비 한사람이 부인과 아들 하나를 두고 살았다. 어느 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선비가 떠나자, 부인은 매일 산에 올라가 남편의 금의환향을 기다리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남편이 장원급제하여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자, 부인은 아들을 등에 업은 채 산마루로 달려 올라가 남편이 타고 오는 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남편은 급제는커녕 그간 새 부인을 맞아 아들까지 낳아서 데리고 왔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 부인은 크게 상심하여 돌아섰다. 그 순간, 등에 업고 있던 아기가 힘을 쓰는 바람에 선 채로 돌로 변했다고 한다.
 이 모두 대상만 다를 뿐, 누군가를 기약없이 기다리는 이야기이다. 기약없는 기다림은 돌처럼 굳어져 섬사람들에게 전설로 남겨져 있다. 

장자도 포구
장자도 포구
 
 선유도 옆에는 무녀도라는 섬이 또 하나 있다. 장구모양의 섬과 그 옆에 술잔처럼 생긴 섬 하나가 붙어 있어 무당이 상을 차려놓고 춤을 추는 품새라 하여 무녀도이다. 그런데 무녀도는 섬사람들에게 ‘서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는 바쁘게 일손을 놀려 서둘지 않으면 살아가기 어렵다는 의미라고 한다. 고기를 잡으러 나간 사람뿐 아니라 남은 사람들도 그물을 꿰매거나 텃밭을 가꾸면서 쉴 새 없이 일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 섬사람들의 기다림이란 아무리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워도 살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던 강인함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여름에 큰 비가 오면 망주봉 사이로 흐른다는 망주폭포는 선유팔경 중 하나로 불릴 정도로 아름답다고 한다. 그런데 문득 그 아름다운 폭포가 언제 올지 모르는 사람을 그리며 흘렸던 눈물로 느껴지는 건 왜일까.
 
장자바위(장자도) 주소 : 전북 군산시 옥도면 장자도리



 
4. 신인합일(神人合一)의 세상과 왕의 무덤, 선유도의 오룡묘와 왕릉
 
 유독 고군산군도의 섬들에는 전통사상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유불선(儒佛仙) 사상을 망라하는, 즉 신선사상과 유가사상, 미륵사상이 혼합되어 있는 이야기들이다. 무엇 때문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저 고군산군도의 섬들을 돌아보며 몸으로 깨닫는 수밖에 없다. 
 
새만금 방조제로 이어진 신시도
새만금 방조제로 이어진 신시도

 
 먼저 신시도를 가보자. 신시도는 지금은 새만금방조제로 연결되었다. 때문에 방조제를 통해서 차를 타고 신시도에 갈 수 있는데, 199봉, 월영재, 월영봉 정상, 대각산 정상, 122봉 등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일일등산길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월영봉이나 대각산 정상에서 바라본 선유도, 장자도, 대장도, 무녀도의 전망은 정말 아름다워서 월영단풍과 무산십이봉이란 말이 왜 나왔는지 실감할 수 있다.
 199봉을 오르면 왼쪽으로는 야미도와 제3호 방조제가 보이고, 정면으로는 신시도 배수관문과 변산반도로 이어지는 제2호 방조제, 그리고 멀리 변산반도까지 희미하게 보인다. 총 길이 33km의 세계 최장 방조제의 전경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배수관문의 오른 쪽에는 33m 높이의 전망대도 세워놓았는데 이름을 가칭 ‘삼삼센터 전망대’라고 붙였다 한다. 방조제 길이 33km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이름이다.
 
신시도 원경
신시도 원경

 신시도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전설이 있는 곳이다. 최치원이 옥구면에서 생활하던 어느 날, 하제의 해변에서 서해를 바라보다 신시도의 우뚝 솟아있는 월영봉을 보았다고 한다. 월영봉의 자취에 취해버린 최치원은 그길로 배를 타고 신시도에 도착하여 월영봉에 올랐다. 월영봉에 오른 최치원은 그곳을 월영대라고 칭하고 돌담을 쳐 거처를 만들었다. 그리고 때로는 생식을 하며 글을 읽었는데 글 읽는 소리가 중국까지 들렸다고 한다. 최치원의 글소리가 서해 너머 중국까지 들렸을 리는 만무하다. 황소의 난 때 ‘토황소격문’을 지어 문장을 날렸던 학자로서 최치원의 명성이 중국까지 떨쳤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맞으리라. 
 이곳은 또한 대한제국기의 대유학자인 간재(艮齋) 전우(田愚)가 일시적으로 거주하며 ‘흥학계(興學契)’를 조직하여 주민들에게 한학을 가르쳤던 곳이기도 하다. 이를 계기로 주민들은 서당을 운영해 왔는데, 이 서당이 44년에 개교 현재까지 존재하는 선유초등학교의 전신이라고 한다. 간재 전우는 조선말 성리학(性理學)의 대가인 임헌회(任憲晦) 문하에서 공부하여 기호학파의 맥을 이은 학자이다. 고종이 여러 차례 출사를 권했으나 모두 사양하고 평생을 후학 증진에 힘썼다. 조선이 멸망하자 말년에는 부안 계화에 은거하며, 호남유학자들의 태반이 간재의 제자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얼마 전에는 제자들이 힘을 합해 부안 계화에 간재 선생의 유지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이처럼 고대를 대표하는 대학자와 근대를 대표하는 대유학자가 한 곳에서 거주했다니 이곳이 얼마나 범상치 않은 곳인지 방증하는 것 같다. 
 
신시도 전망대
신시도 전망대
 
신시도에는 ‘임씨 할머니’라는 전설도 내려온다. 옛날에 임씨 성을 가진 자가 딸을 낳았다. 그 딸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양손 모두 주먹을 꼭 쥐고 있었는데, 스무 살이 넘어 처녀가 될 때까지도 손바닥을 단 한 번도 펴지 못했다. 부모들은 과년하게 자란 딸을 시집보내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홀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임씨 집안에서는 지관을 대어 신시도에 있는 대각산 용머리 옆에 묘 자리를 정했다. 지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인부들이 묘 자리에 구덩이를 파고 있었는데, 갑자기 뿌연 연기 같기도 하고 흰구름 같은 것이 몽실몽실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속에서 흰 학 한마리가 깃을 펄럭이며 오르다가 그만 떨어져 죽어버렸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너무 놀라 모두 정신을 놓을 정도였는데 이것을 지켜보던 딸이 느닷없이 쓰러지더니 운명을 달리 했다. 온 동네가 발칵 뒤집어진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더 이상한 일이 생겼다. 그때까지 한 번도 펴지지 않았던 딸의 손이 펴졌는데 그 손바닥에 임금 왕(王) 자가 그려져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일이 여간 예사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죽은 딸이 왕이 되든지 왕비가 될 운명이었는데 그만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마을은 온통 통곡의 바다였다. 더구나 그 다음 날에는 임씨 딸이 시집갈 때 쓰려고 했던 돼지 여덟 마리도 죽어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황망하고 슬픈 마음을 추스르며 학이 나왔던 자리에 임씨 딸을 묻고, 그 옆에 아버지 임씨를 묻어주었다. 이때 죽은 임씨 딸을 신시도에서는 아직도 ‘임씨 할머니’라 부르고 용머리 어딘가에 그 무덤이 있다고 믿고 있다.


신시도 배수갑문
신시도 배수갑문
 
  □ 선유도의 오룡묘와 왕릉

  망주봉 남쪽 기슭에는 ‘오룡묘’라고 불리는 두 채의 당집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 섬사람들은 각각 윗당, 아랫당이라 부른다. 바다라는 자연에 삶과 죽음을 의탁해야 했던 섬사람들이 용신, 바다의 신을 모시는 당산이다.
  송나라의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이『선화봉사 고려도경』이라는 책을 썼다. 이때 서긍은 중국에서 출발하여 흑산도와 선유도를 거쳐 개성으로 갔다. 이때 선유도에 왔던 서긍은 오룡묘를 보고 갔다고 기록하였다. 이처럼 오룡묘의 역사는 깊다. 옛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마을 근처의 자연에 대해 외경심(畏敬心)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이 자신은 물론 마을 사람들의 평안을 지켜주는 힘을 가진 존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룡당
오룡당

 
 그 대상은 환경에 따라 산이 될 수도 있고 마을 언덕이 될 수도 있으며 큰 돌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옛 사람들은 신이 깃든 곳이 자연환경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에도 신이 깃든다고 생각했다. 각 가정의 부엌에는 여인들의 신인 조왕신, 화장실에는 성격이 까다로운 측신, 마루에는 성주신, 굴뚝에는 장군신, 외양간에는 궁웅신 등이 있다고 믿고 모셨다. 자연을 단순히 극복해야 될 대상이나 마구 파괴해도 되는 자원으로만 인식한 게 아니었다.
 자연과 사람, 즉 신과 사람이 사람과 사람이 모두 조화를 이루고 사는 삶이 가장 이상적인 삶이었던 것이다. 이런 신인합일의 세계는 고운 최치원이 꿈꾸던 사회였고 사람과 사람이 교화를 통해 서로 도우며 사는 사회는 간재 전우가 꿈꾸던 사회였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신인합일의 세계를 잊고 살게 되었다. 선유도만 해도 오룡묘 당제의 전승이 끊긴 지 오래다. 오룡묘를 지키던 마지막 단골무당이 죽은 1990년대 이후는 관리자도 없이 방치된 상태라고 한다. 인간과 신(神)이 함께 살던 세계의 마지막 흔적마저도 사라질 위기인 것이다. 지금 고군산군도는 20세기의 마지막 대역사(大役事)라고 불리는 새만금간척사업의 중심에 있다. 이와 함께 고군산군도 곳곳에는 전설과 신화의 모습으로 신인합일의 세상을 꿈꿨던 사람들의 열망이 살아있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자전거를 타고 섬을 둘러보게 하는 모습이 바로 그 예이다. 
 

오룡당 내부
오룡당 내부

 
 그런데 선유도에는 무덤과 관련된 흥미로운 전설이 하나 있다. 선유도에 왕릉이 있었다는 것이다. 숙종 8년(1682)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여비고』라는 고지도를 근거로 한다. 그 지도에 있는 군산도(선유도)에는 큰 무덤이 있고, 그 아래 왕릉(王陵)이라고 쓰여 있다.『동여비고』는 같은 지도에 있는 익산지역의 지도를 근거로 익산의 쌍릉을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능으로 추정할 정도로 사료적인 가치를 인정받는 고지도이다. 또 하나의 근거가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망경현 산천조에는 ‘군산도(선유도)는 현의 서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주위가 60리이다. 벼랑에 배를 감출만한 곳이 있어 모든 배들은 이곳에서 순풍을 기다린다. 섬 가운데 마치 왕릉 같은 큰 묘가 있었는데, 근세에 이웃 고을 수령이 그 묘를 파내어 금은보화를 많이 얻었다. 이를 사람들이 고발하여 도망하였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와 같은 사료를 근거로 선유도에 왕릉 규모의 큰 묘가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아쉽게도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바는 아직까지 없다.
 일부 학자들은 민속학적인 측면에서 선유도에 왕릉이 있었다는 증거는 당산인 바로 ‘오룡묘(五龍廟)’에서 찾기도 한다. 지역의 토속신을 모시는 곳을 내륙에서는 서낭당 혹은 당집 등으로 부르고 바닷가에서는 오룡당이라 부르는데, 다른 지역과는 달리 유독 선유도에서만 오룡묘라고 해서 묘(墓) 자를 붙인다. 신성한 당집에 왜 묘라는 명칭을 사용했을까.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오룡묘에서 모시는 다섯 신에 있다. 지금은 분실했지만 오룡묘에는 다섯 장의 토속신 그림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그 토속신은 최씨부인, 수문장, 성주, 오구유왕 등인데 앞의 토속신은 어느 지역이든 모시는 신이지만 오구유왕은 어느 지역에도 보이지 않는 토속신이라고 한다. 오구유라는 명칭도 특이하지만 왕(王)이라는 호칭은 또 무엇인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오룡묘가 본래는 선유도 왕릉의 제사를 진행하는 곳이었으나 후대에 지역 토속신앙과 결합하여 당산의 신으로 모셔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하나 선유도의 왕릉이 고려 왕족의 무덤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몽고침입 때 고려왕조는 삼별초 항쟁이 보여주듯이 서해안 도서지방을 근거로 저항했다. 이 점과 선유도가 고려의 외교와 무역의 거점지역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고려의 일부 왕족이 선유도에 머물며 저항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선유도의 왕릉은 그때 머물었던 고려 왕족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오룡당이 위치한 바위 언덕
오룡당이 위치한 바위 언덕



5. 아름다운 절경, 관리도
 
 고군산군도는 고려 때부터 수군영이 설치된 군사적 요충지이다. 조선 세종 때 수군의 진영이 군산으로 옮겨진 후에도 선유도에는 지속적으로 수군 진영이 설치되었다. 선조 2년(1569)에 망주봉 기슭에 김영아문이라는 수군기지를 설치하고 수군절제사를 파견하여 임피, 옥구, 만경, 김제, 부안, 고창, 무장, 영광 등 8개현을 관할케 한 일이 있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으로 일시 폐쇄되었는데 선조 33년(1600)에 현재의 선유도 중심인 진리마을 우체국 뒷산 기슭에 다시 수군 진영을 지었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인조 2년(1624)에는 별장진을 두었고, 숙종 원년~9년(1675∼1683)에는 고군산진을 각각 신설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역사가 지명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곳이 고군산군도 서쪽 끝에 있는 관리도(串里島)이다. 관리도는 ‘곶리도’, ‘곶지도’라고도 하는데, 섬의 이름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하나는 본래 섬의 이름이 ‘꽂지섬’이라는 건데, 군사적 요충지였던 이곳에서 수많은 장군들이 활을 쏘아 적의 몸에 화살을 꽂아 댔다고 하여 꽂지섬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섬의 지형이 마치 꼬챙이와 같다 하여 ‘꼭지도’라 부르다가 꼬챙이 관(串)자를 붙여 관리도라 불렀다는 것이다. 
 
관리도 민물상 바위
관리도 민물상 바위

 
 이 섬에는 군사와 관련된 지명들이 특히 많다. 완전무장한 장군의 모습을 한 ‘투구봉’, 말을 탄 기세당당한 무사의 모습을 한 ‘질망봉(말봉우리)’, 승려로 이루어진 군사의 모습을 한 ‘중바우(중바위)’와 시루떡 모양의 ‘시루봉’ 등이다. 지명만 보면 온갖 군인들이 모여 전투를 준비하는 것처럼 험악한 곳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관리도도 다른 고군산군도의 섬 못지않게 아기자기 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특히 현업으로 고기를 잡는 주민들이 많아서 섬 어디를 가나 그물을 꿰매거나 햇볕에 말리는 풍경을 목격할 수 있다. 

관리도 절경
관리도 절경

 
 근래에는 관리도가 전국의 강태공들에게 주목을 받는 바다낚시터로 각광을 받고 있다. 육지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서 상대적으로 청정한 바다를 유지하고 있을 뿐더러 낚시배를 어느 지역보다 싸게 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주로 낚이는 어종은 우럭과 아나고라 불리는 붕장어이지만 운이 좋으면 돔 종류의 어종을 낚을 수도 있다.
 
 관리도 천공굴
관리도 천공굴


관리도 주소 :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 관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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