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사이트맵

김육불망비

이미지 로딩중
01.jpg
01.jpg
위치정보
(54502)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함라면 천남1길 13
문의전화
일반전화 : 063-859-5791
여행후기
☆☆☆☆☆ (0)건
<p class=article_cont>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문신 김육의 불망비이다. 2002년 12월 14일에 익산시 향토유적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이 비석의 건립년대는 조선 효종10년 1659년으로 영의정 김육(1580~1658)이 사망한 이듬해로서 호남지역의 대동법 실시를 여러 차례 건의하고 유언으로까지 임금에게 간절하게 당부한 김육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한 일종의 선정비이다.<br />
비는 기단, 비신, 이수로 구성되었으며 기단은 화강암, 비신과 이수는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비의 전면에는 중앙에 &lsquo영의정김공육경요보민인덕불망비(領議政金公堉輕徭保民仁德不忘碑)&rsquo라 새겨져 있으며, 그 좌측 하단부에 &lsquo산부대 상공 해부심 고금&rsquo이라는 명문과 후면에 &lsquo기해 이월&rsquo이 음각되어 있다. 이수에는 양각으로 무늬를 조각하였는데, 전면 중앙에는 두 마리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으며, 주변을 이무기의 몸체가 감싸고 있다. 이수의 후면 중앙에는 국화무늬가 있고 주변에는 구름무늬가 양각되어 있다.</p>
<h3 class=article_tit>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실학적 개혁 정치가, 김육</h3>
<p class=article_cont>
김육(金堉, 1580&sim1658)은 실학적 개혁 정치가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1605년(선조 38) 사마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입문하였는데 광해군 때 조정에서 쫓겨나 10년 동안 은거하다가 1623년에 인조 즉위 후 복귀하여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다. 그 후 충청도관찰사와 한성부우윤·도승지·병조참의·대사헌·예조판서·개성부유수 등을 거쳐 1651년(효종 2)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는 상평통보의 유통과 대동법 확산에 힘을 기울였으며 후대의 실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p>

이용안내

해당 관광 콘텐츠에 관련된 세부적인 내용을 안내하는 표
목록으로
여행해결사 '1330 관광통역안내'

내·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다양한 국내여행 정보를 안내하는 전화상담 및 실시간 문자채팅 서비스

* 한국관광공사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