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 부자의 대명사로 천석꾼이니 만석꾼이니 하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천석꾼이란 소작료 수입이 나락으로 1천 석쯤 되는 사람, 그러니까 반타작을 했다 가정하면 대략 100정보(30만평) 내외의 농지를 소유한 거부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숫자는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다. 조선 역사상 지주제가 가장 발달했다는 1930년도에도 천석꾼은 757명(일본인 236명), 만석꾼(500정보 이상)은 43명(일본인 65명)에 불과 하였다.
그러면 한국 근대의 만석꾼들은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신분제도와 토지제도에 의해 개개인의 사회 이동이 철저히 차단되어 있었던 조선왕조시기와는 달리 구한말은 그야말로 가능성의 시대였다.
구한말은 조선왕조 사회가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강제로 포섭되면서 왕성하게 발달하던 시기였다. 쌀, 콩, 면화의 일본 수출이 늘어나고 이에 따라 상업적 농업과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잘만 하면 한밑천 잡을 수 있은 기회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신분제가 해체되고 국가기강이 해이해지면서, 돈만 좀 있고 줄만 잘 서면 시골 군수 자리 하나 따내는 것은 정말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티끌모아 태산을 이룬 만석꾼은 없었다.
공주의 김갑순은 봉세관과 군수질을 통해 1930년대 말 1천500정보의 논밭을 소유할수 있었고, 태안 환도 이씨가, 화신백화점 주인 박흥식, 암태도 소작쟁의로 유명한 목포 지주 문재철, 전형적인 양반 종갓집으로 유명한 해남 윤씨가, 동아일보 사주인 김성수를 배출한 고부 김씨가 등도 구한말 상업적 농업, 혹은 상업과 고리대를 통해 당대 만석으로 성장한 사람들이었다.
구한말의 만석꾼들은 그 신분이 매우 다양했다. 충남 최고 갑부였던 김갑순은 구한말 공주감영의 방자였으며, 논산 갑부인 김철수는 정승집 마름, 서산 갑부인 백남복과 예산 갑부 김성권은 상인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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