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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교 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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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시 입암면 대흥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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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일순(증산)은 4240년(1907) 금구면 거야 주막에서 우연히 차경석을 만나 입암면 대흥리로 오게 된다. 
여기서 강증산은 차경석의 이종매(姨從妹)인 고씨 부인과 결혼하고 차경석에게 도를 전한 다음 4242년(1909) 전주로 이거했으나 4243년(1910) 나이 서른 아홉 살에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로 세상을 뜨게 된다. 

바로 이 해가 보천교의 창교기원일이다. 
강증산이 김제군 금산면 동곡리(銅谷里/구릿골)에서 39세로 요절한 다음 당시 문하의 신도들이 각기 분파하여 수많은 교파를 낳게 되었다. 
그 중 보천교(4242년/1909년 창교 당시는 보화교)는 한때 600만(혹자 700만) 신도를 자랑하는 종교로 성장했다. 
차경석의 자는 윤홍(輪洪) 호는 월곡(月谷)이다. 
4213년(1880) 동학접주 차치구(車致九. 본명 重弼)의 아들로 고창군 부안면 연기동(선운사 어구 동편)에서 출생하였고 강증산을 만나 도를 전수 받았다. 

보천교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억압하에서도 기구를 조직하고 웅대한 교전을 축조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었다. 
차경석의 차남인 차문현씨에 의하면 보천교의 신자수가 늘면서 밖에다 지은 건물중 일부인 십일전은 현 조계사 건물로 원래는 안과 바깥쪽에 공포가 15개가 있었으나 각각 6개의 공포를 제거한 뒤에 복원하였다 하며 일제가 민족의식을 가진 보천교를 탄압하면서 건물을 장작으로 뜯어서 팔기도 했다 한다. 보화문은 북에 위치한 정문으로 현재 내장산 대웅전으로 복원되어 있다. 

보천교는 한때 한국일보의 전신인 시대일보(사장 최남선)의 주식을 사들여 실질적인 주주역할을 하기도 했다. 
당시 대흥리는 민가 10여호로 구성된 한촌이었으나 교세가 확장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신자들로 일약 700여호를 헤아렸다 한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교세가 서서히 줄기 시작했다. 교리는 인의(仁義)이며 4대 강령이 경천(敬天) 명덕(明德) 정론(正論) 애인(愛人)이다. 상생(相生)이 주의이며 대동(大同)을 목적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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