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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리 천주교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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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시 과교동 신성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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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구총수』에 정읍현 남일면 신성리 (新星里)로 기록되어 있어 월성마을 위쪽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천주교가 전래되면서 신성(新城)이란 지명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는 내장면 신월리 신성(新成)으로 개편되었다. 월애, 수랑메, 새터로 구성된 마을로 1882년(?)에 천주교 박해를 피해 전주지방의 신자들 중 일부가 피난온 것이라 한다. 신자들은 산허리에 화전을 일구어 담배 농사를 지으면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돌무더기가 지금도 남아 있어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김영구(베드로) 신부가 쓴 천주교 포교에 대한 호남지역의 역사를 다룬 『천주교 호남발전사(天主敎 湖南發展史)』의 기록에 의하면 1903년 프랑스의 맹 미알롱신부(맹석호)가 부임하여 16년간의 포교 활동을 하면서 부근에 기와 굽는 공장을 설치하여 여덟 칸의 성당과 네 칸의 사제관을 짓고 아래쪽에는 여섯 칸의 사랑채를 건축하였다. 주변은 마치 석성과 같은 견고한 담장을 쌓았는데 당시 조선 정부가 천주교를 탄압하자 천주교 신자들이 관군의 기습에 대비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또한 맹 신부는 인근 순창, 고창, 부안, 장성을 비롯하여 담양 등지에 지교회 36개소를 설립했다고 한다. 사제관(司祭館) 아래쪽은 움푹 패인곳은 담장 구멍을 내서 밖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이는 성당 밖 동향을 파악하기 위한 경계용으로 볼 수도 있으나, 신성공소 서순철 회장에 의하면 음식물을 보관하는 냉장고 역할을 했던 곳이라 한다. 성당 왼쪽 대나무 근처에는 프랑스에서 직접 가지고온 술(포도주)을 보관했다가 마셨다는 술통이 있었으나 지금은 마을 주민인 천주교 신자 임충남씨가 보관하고 있다. 참나무의 일종인 굴피나무로 만든 이 술통은 100여 리터의 포도주가 족히 들어갈 수 있는 크기로 성당으로 옮길 때도 굴려 가지고 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성당 아래쪽의 대나무밭 근처에도 성당이 들어서기 전에 4칸의 예배당이 있었다고 하니 신성마을은 천주교 전래와 관련된 지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현재 성단 건물은 없어지고 사제관에 해당되는 건물을 성당으로 활용하여 일요일이면 신자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 사제관 왼쪽의 부속건물은 사랑채 역할도 하고 외지에서 온 신자들의 숙소 역할도 했는데 6.25전쟁 때 인민군 치안대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폭격을 면했다고 전해진다. 사랑채는 주민들을 가두어 두는 감옥으로 이용되었다. 성당 주변의 세 집은 지금도 천주교를 신봉하고 있고 서순철(알베르토) 회장이 관리하고 있다. 추녀 끝을 덮는 기와는 '천주강생(天主降生) 1917'이라고 음각되어 있는데 이것을 기와를 제작한 연대로 보고 있다. 성당은 그 뒤 선은동의 천주교 자리로 옮겼다가 시기동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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