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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 진구사지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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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정보
전북특별자치도 임실군 신평면 용암리 734
문의전화
일반전화 : 063-640-2114
여행후기
☆☆☆☆☆ (0)건

보물 267호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 석등

진구사지석등은 우리나라의 석등으로는 가장 큰 것의 하나이며, 아깝게도 상륜부(相輪部)가 없어졌다.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보물 267호로 지정되었다.
8각의 지대석 위에 놓인 하대는 2매석으로 되었으며 8각 하대의 각 측면에는 가늘고 길쭉한 안상(眼象)을 새기고 상하에는 굽을 둘렀다. 이 위에 올려진 연화대석 위에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으며 8판씩 조각하였는데 그 끝에는 큼직한 귀꽃을 달아 장식하였다. 간주석은 원주형으로 중앙에는 북모양으로 배가 부른 양각대가 있고 상, 하단의 주위에는 복엽8판의 양, 복면을 대칭이 되도록 조각하였다. 상대석에는 낮고 높은 2단의 원형 괴임이 조출(彫出)되고 측면에는 단엽8판의 앙련이 새겨져있다. 화사석(火舍石)은 8면에 모두 장방형의 화창을 내었다. 옥개석은 하면에 3단의 낮은 괴임을 조각하였고 추녀의 낙수홈도 각이 낮다. 전각 끝에는 삼선형의 큼직한 귀꽃을 세워 놓았고 웅장하면서도 경쾌한 모습을 모이고 있다. 낙수면의 각 합각은 뚜렷하며 상부에 복련을 놓아 상륜부를 받도록 하였다. 옥개석 정상에는 현재 8각의 노반과 암화석만이 남아 있으나 원래는 보개(寶蓋)와 보주(寶珠)등 여러 가지 상륜부재가 있었을 것이다.

조각된 문양이 섬세하고, 조화를 이루고 있어...

진구사지석등은 조각된 문양이 섬세하고 다양하며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지난 1992년도부터 실시한 5차례 발굴조사에서 “진구”라는 명문기와가 출토되어 이곳이 보덕화상의 제자가 세운 진구사지임이 밝혀졌다. 진구사가 번성했을 당시에는 수도승이 천여명을 헤아렸다고 전하여지고 있으며, 석등의 규모로 미루어 보아도 이곳에 거대한 절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진구사가 폐허로 변한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일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다고도 하고,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절 앞에 흐르는 섬진강이 엄청난 홍수로 범람하는 바람에 사찰은 물론 승려 모두가 홍수에 휩쓸린 후 폐허로 변했다고도 한다. 폐허로 변한 진구사지에 1924년 당시 주지 박봉주씨가 중기사라는 절을 중건하였으나 발굴조사를 위해 지금은 철거되었다. 당시의 본당은 정면4칸, 측면2칸의 함석지붕으로 이루어져 요사(療舍)를 겸하고 있었다. 본당 우측 동현으로 정면 2칸, 측면칸도 역시 함석지붕으로 이루어져 산신각(山神閣)이 세워져 있었다. 현재는 철거된 중기사에서 모셔졌던 비로자나불을 인근 건물로 옮겨 보존하고 있으며, 발굴조사를 통하여 용암리사지가 진구사지임이 밝혀지자 지금은 진구사라고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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